수필 40

마지막 연재글

금기를 어긴 사랑 -흑인 오르페와 카니발의 아침-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사나…’ 글룩의 오페라 에서 메조 소프라노 제니퍼 라모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슬퍼하는 오르페우스의 심경을 담담하게 노래한다. 아폴론과 칼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난 오르페우스는 물의 요정 에우리디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가 리라를 켜며 노래하면 만물이 온순해졌다. 어느 날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죽자 오르페우스는 하계로 내려가 아내를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저승 왕 하데스는 그의 연주에 감동하여 아내를 데려가되 이승에 닿을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남편을 사랑이 식은 걸로 오해한 아내를 보고 오르페우스가 급히 뒤를 돌아보자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세계로 떨어진다. 상심하여..

폐부를 찌르는 쓸쓸함

폐부를 찌르는 쓸쓸함 -영화 길(La Strada)과 니노 로타- 김소현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환절기는 두렵다.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과는 분명 다른 신산함이 있기에. 그 쓸쓸함을 닮은 소리가 있다. 니노 로타의 영화음악에서 흐르는 트럼펫이다. 트럼펫은 시끄러운 악기라고만 생각했었다. 군대에서 기상과 취침시간을 알리는 단순한 ‘나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랜 기간 트럼펫을 외면하고 음색이 비슷하면서도 부드러운 플루겔 혼을 자주 들었다. 척 맨지오니 내한공연을 보고나선 더욱 그랬다. 최근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 연주를 듣고서야 그 소리의 매혹을 알게 됐다. 고독한 남자의 독백 같은 애잔한 소리라니. 하이든의 처럼 때로는 힘을 주기도 하는 매력적인 악기다. 이탈리아 영화음악가 니노..

그런 인생-영화 <조커>의 음악들

그런 인생 - 영화 의 음악들 - 김소현 회색빛 도시 고담 시에서 코미디언을 꿈꾸는 가난한 광대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은 정신질환으로 상담을 받으며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그의 어머니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그를 '해피'라 부른다. 그에게는 웃음이 멈추지 않는 질환이 있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퇴근길 회사원들을 만나고 (그 웃음 때문에) 오해를 사 의도치 않게 살인을 하게 된다. 엉뚱한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춤을 추는 남자, 그 춤은 슬픔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시장의 아들이라 믿었다가 어머니의 피해망상임을 확인하고 어머니를 질식사시키는 아서….그의 우상이었던 코미디 쇼의 거물(로버트 드 니로, 하회탈처럼 얼굴에 주름이 많아 못 알아봤다)도 자신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방송 중에 총으로..

지중해의 '저녁노을'

지중해의 ‘저녁노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Im Abendrot- 김소현 주말 밤, 텔레비전에서 신비스런 시그널 Alma Mater가 흐르고 고요한 스튜디오에 폴 윈터의 Winter's Dream이 은은히 깔리면, 파리지엔 풍모의 한 은발신사가 정제된 어조로 영화와 음악을 소개한다. 가슴 설레며 그 공간으로 빨려들어 간다. 다양하고 때로는 테마가 있는 영화와 음악이 있는 그 곳에서 잠시 감성에 젖는다. 영화 가 소개될 때 바다 위를 미끄러지는 배와 절묘하게 흐르는 배경음악에 마음이 일렁였다. 거침없이 찌르는 듯한 도입부의 첫 음은 회색빛 대기에 한 줄기 빛을 비추듯 전율이 일었다. 음악 덕분에 찾아본 영화가 한둘이던가. 서둘러 영화를 검색했다. 잡지사의 제안으로 영국에서 이태리로 여행 온 두 남자 (코미..

러시아 서정

러시아 서정 김 소현 “소현 님 좋아하는 곡이네요” 라디오 음악방송에서 ‘올드 로망스‘가 나오자, 게시판의 몇 사람이 올린 반응이다. 러시아 음악이 나올 때마다 내가 ‘좋아요’ 누른 걸 기억한 거다. 올드 로망스는 푸쉬킨 원작소설 영화에서 흐른 곡이다. 눈 내리는 거리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애틋하게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는 남녀의 모습과 흐르는 곡이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애끓는 슬픔이 담긴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인 작곡자 스비리도프가 만든 9개의 곡 중 여섯 번째 곡이다. 러시아 로망스는 18세기 말 경 사랑과 이별, 인간의 영혼과 자연을 주제로 쓴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우리나라 가곡과 비슷한 대중음악이다. 귀족들의 ‘전용음악‘으로 사랑받아오다 서서히 일반인들에게도 알려..

지금, 그녀의 회색탁자엔..

지금, 그녀의 회색탁자엔 / 김소현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하늘을 본다. 낮게 드리워진 잿빛구름이 뭔가 쏟아 부을 듯하다. 흐린 날의 서해(바다)를 닮았다. 잔설이 묻은 건너편 산은 나이 든 사람의 머리 모양새 같아 운치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오늘은 몇 명일까. 감염 병 확진 자 수를 확인하며 걱정과 안도를 반복하는 요즘, 그 수에 따라 우울의 채도가 옅어지고 짙어진다. 귀는 음악에, 눈은 텔레비전 여행방송에 가 있는 게 일상이다. 내게도 ‘코로나 블루’가 찾아온 건지 때로 답답하고 울적하다. 단세포적으로 이어지는 하루하루가 지겹고, 이러다 치유할 수 없는 멜랑콜리아가 찾아오는 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간은 무섭게 흐른다. 회색바람이 부는 요즘 음악과 영화는 평소보다 더 큰 위안이다. 습관..

수필 2021.06.24

재즈 음감회

가을비가 낙엽처럼 처연히 내리는 밤, 음악 하나를 찾아 듣는다. 줄리 런던의 Round Midnight…. 눈을 감고 음률에 젖어든다. 재즈의 스테디셀러 같은 이 곡은 1940년대에 활동한 비밥재즈의 대표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 곡이다. 여러 뮤지션이 불렀고 팝처럼 대중화된 지 오래다. 오늘은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 요즘 재즈를 자주 듣는다. 클래식과 팝, 영화음악은 꾸준히 듣고 있지만 재즈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극히 적었다. 내가 좋아하는 재즈 뮤지션은 한국의 말로와 박성연, 엘라 피츠제럴드, 마할리아 잭슨, 니나 시몬 정도였다. 일 년 전쯤 인터넷 재즈밴드에 가입하여 음악을 들으면서 많은 뮤지션과 곡을 알게 됐다. 그 중 웨스 몽고메리 기타에 푹 빠졌다. 그는 1966..

고독한 귀차니스트의 일기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산다. 사은품으로 받은 책자에 가수 이 적의 두 번째 책 출간 기념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그의 말 중 '늙지만 말고 놀기도 하자'란 말이 좋아서 대화 방에 올렸는데 다음날 자세히 보니 ‘놀기도’가 아니고 ‘늘기도’였다. 어쩐지 말이 좀 이상하다 했다. 점잖은 이 적이 놀겠다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걸까. 의미가 크게 다른 말을 버젓이 올려놓고 태평했다. 나이 탓이란 변명은 하지 말자. 뭔가를 제대로 보지 않고 대충 내가 보고 싶은 것으로 판단하는, 참 어이없고 무책임한 행태에 나 자신 놀랐다. 나는 그렇게 놀고 싶었던가. 아니면 ‘노는 것’을 합리화하고 싶었던 건가. 나태주 시'풀꽃'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쁜 게 아니고 자세히 보아야 잘 보인다. 그것은 비단 글씨만은 아닐 것이다...

수필 2020.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