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 풍경 220

줄들의 향연

복부를 열고 식도 절제 수술을 받은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하루를 지낸 뒤 집중치료실로 옮겨졌다. 산소호흡기와 이런저런,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줄을 여럿 매달고.. 그러나 시일이 지나며 상태가 좋아질수록 그 줄은 하나씩 제거된다. 그리고 다시 일반 병실로.. 수술 5일째, 줄들의 향연은 끝나고 이제는 유동식이 들어가는 줄과 약물주사 줄, 노폐물 배출 줄 세 개 정도만 매달려 있다. 흉부외과 수술은 많이 걸어야(운동) 회복이 빠르다 한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걷고 있다. 병원 복도를. 사후에 강한 타입.. '의료 대란' 직전에 수술을 끝내 참 다행이다. 그동안 응원과 기도를 해주신 주변 지인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세수하고 거울을 보는데 낯선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그새 십년 쯤 늙은 듯..ㅠ 아침에 눈을 뜨고..

삶, 그 풍경 2024.02.24

요즘엔..

얼치기 간병인 노릇을 한 지 3개월째다. 요즘 나의 생활 루틴은 가히 AI적이다. 환자의 끼니를 위해 하루 세 번 정확히 시간을 지켜 밥상을 차린다. 아니 죽상을.. 8시, 12시, 저녁 6시.. 하루 세 번 죽을 끓이면서 나의 자아는 죽을 쑤었다. 하지만 사람 하나 살리는 데 일조한다면 까짓 자아쯤이야.. 그러는 동안 그림자처럼 라디오가(음악이)나의 동선을 쫓는다. 안방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안방으로.. 늘 그랬듯 라디오가 나의 버팀목이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정리를 마치면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다. 고요한 밤의 적막을 즐기며 혼자 놀다가(티비도 보고 인스타도 보고 책도 보고..) 얼추 1시쯤 불을 끈다. 한 주에 한 번 마트에 가는데 유일한 외출이어선지 먹거리를 고르는 손길이 느긋하다. 하지만 카트 가..

삶, 그 풍경 2024.01.30

4차 퇴원

마지막 항암을 끝내고 퇴원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제 방사선 치료 끝나면 좀 쉬었다가 검사 후 수술 예정이다. 재발의 위험이 있지만 수술로 암을 떼내면 밥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병상이 창가쪽으로 배정돼 일주일 동안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하늘 밖엔 보이지 않음 ㅋ) 오전엔 연푸른 하늘길에 비행기가 느리게 지나가고 저물 녘엔 어둠에 잠긴 산등성이 위로 감귤빛 해거름과 그 위에 연푸른 하늘 색이 그라데이션 돼 환상이었다. 병실임을 잊고 시름도 잊고 심취.. 이제 퇴원하면 창밖 아닌 창 안을 보며 지내게 된다. 또 다시 눈이 내린다. 병실에서 보는 마지막 눈이려나~

삶, 그 풍경 2023.12.19

산책길

15일, 4차입원을 앞두고 휴식?하는 나날.. (매일 병원으로 출근해 방사선 치료만 받고 있다.) 날씨도 따듯해서 오랜만에 산책길에 나섰다. 병색 짙은 나무들 사이 소나무는 꿋꿋하게 초록을 과시하고 천변 버드나무도 푸른 기가 남아 있다. 봄날의 힘있는 낭창함은 아니었지만 휘어질지언정 꺾이지는 않겠다는 듯 기운 없이 늘어져 있다.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얼마전까지 평화롭고 권태롭게 걸었었지 생각한다. 삶은 참 지루할 틈이 없다. 주인을 따라 쫄랑쫄랑 견공들이 지나간다. 목줄에 매여 주인 눈치를 보며 따라가는 걸 보면 안쓰럽다. 티비 프로 중 동물농장을 즐겨 보는데 유기견이나 고양이들 구출하는 걸 보며 힐링하려는 마음이 크다. 포획된 후 병원에 가 검진하고 목욕하고 배불리 먹고 좋은 사람에게..

삶, 그 풍경 2023.12.10

겨울 시작

3차 항암을 마치고 또 다시 퇴원했다. 12월부턴 방사선 치료를 병행한단다. 이젠 병원이 제2의 집처럼 편안?하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그의 배려로 (허리가 부실한 나를 생각한 듯) 나는 출퇴근하는 간병인처럼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가 저녁식사(미음)를 마치면 불편 없게 마무리를 한 뒤, 어둠을 뚫고 찬바람 부는 (언덕에 위치한) 지상주차장으로 향하곤 했다. (지하는 입퇴원 날 제외하곤 주차료가 어마무시하다) 환자가 거동을 할 수 있기에 가능했던 것..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면 통원이지만 4차 항암 시작하면 다시 입원을 해야 한다. 그땐 그도 힘들어서 24시간 곁에 있어야 할지도.. 방사선 끝나면 수술을 하게 될지.. 기관지에 붙어 있는 암은 수술해도 재발 가능성이 높다 한다. ㅠ 병원 1층은 커..

삶, 그 풍경 2023.12.01

생각들

작년엔가. 우리집 에어컨 실외기에 비둘기가 와서 그 배설물 때문에 골치라고 아래층에서 민원을 넣어 관리실에서 (비둘기가 앉지 못하게) 뾰족뾰족한 뭔가를 들고 와 실외기 위에 놓고 간 적이 있는데.. 또 다시 같은 내용으로 관리실에서 연락이 왔다. 아래층에 내려가 젊은 여인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사진까지 보여주며 어떤 조치를 원한다. 11층도 있고 12층도 있는데 왜 콕 집어 우리집이라 단정하는지. 창밖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비둘기에게 오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할까. 나도 비둘기만 바라보며 살 수 있음 좋겠다. 그는 2차항암을 마치고 쉬고 있다. 일주일 치료, 2주 휴식. 이런 식이다. 암이 작아졌는지 ct를 찍어보고 싶었으나 의사는 (회진 때)2차로는 변함이 없고 3차 후 찍어보자 한다. 그러면서 ..

삶, 그 풍경 2023.11.11

조용한 투병

1차 항암을 마치고 집에 온 지 10일째다. 그는 죽과 간식을 먹으며 묵묵히 견디고 있다. (이어폰을 끼고 소리는 죽인 채 온종일 티비 화면으로 당구와 기타 스포츠를 보는 멀티 태스킹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옛날 죽순이 실력을 되살려 열심히 죽을 끓이고 믹서로 갈아 그에게 먹이고 있는데 그 손놀림은 거의 기계적이다. 반찬은 사골국물과 동치미 국물, 간식은 두유와 요플레, 연시, 바나나, 간 사과와 토마토 정도다. 내과의사는 암환자에게 과일은 쓰레기일 뿐이라며 고기를 먹으라 했다. 그래서 거의 소고기죽과 전복죽을 끓이고 너비아니를 구워 잘게 썰어 먹인다. 단지 삼키지 못할 뿐 의식 멀쩡하고 식욕은 왕성한데 그 공복감이 오죽하랴..ㅠ 다행인 건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짜증을 내지 않는 거다. 누군가에게 피해..

삶, 그 풍경 2023.10.26

가퇴원

그가 1차 항암을 마치고 퇴원했다. 2차는 2주 후부터다. 의료진 요청으로 첫번째 암 병리 슬라이드를 가지러 삼성병원에 다녀오는데 몸이 안 좋았다. (바로 주는 게 아니고 신청을 해야 했다)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열도 나는 것 같아 간호사에게 열체크를 부탁하니 코로나 검사를 하라한다. 편의점에서 키트를 사다가 자가진단해보니 양성으로 나왔다. (다행히 남편은 음성) 아이러니하게도 병은 병원에서 걸린다. 커튼 너머에서 심하게 기침을 하다 코로나 양성 결과로 병실을 나간 노인이 생각난다.ㅠ 간호사는 옆 침대 환자가 폐렴환자라서 감염되면 안 되니 빨리 집으로 가란다. 그를 홀로 두고 집으로 줄행랑.. 사흘 동안 약 먹으며 침대에 누워 앓다가 5일째 되니 회복이 좀 된 느낌이다. 체중계에 올라서니 2키로가 빠졌다...

삶, 그 풍경 2023.10.18

또 다시 '죽순이'로..

15년 만에 건강겅진을 받은 남자가 있다.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사람들 투성이인 세상인데.. 근 한 달 전부터 밥을 제대로 안 먹어 아디 어프냐고 물어도 대꾸를 안 하던 남자, 다른 일 있냐고 다그치자 몸이 안 좋다고 한다. 음식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오래전에도 입 속에 암덩어리가 보여서야 내게 말 한 남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연휴 때라 병원도 못 가고 있다가 연휴 다음날 그를 끌고 병원에 가 위내시경을 했는데.. 식도암이라 한다. 큰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그는 집으로 가자 했다. 더 이상 힘든 수술 하지 않겠다며.. 시간의 힘인가. 나이의 힘인가. 첫번째와 달리 덤덤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병원을 싫어하는 그를 어떻게든 입원시키고 죽이든 뭐든 먹이며 간병하는 게 내 할일..

삶, 그 풍경 2023.10.06

영흥수목원

수원 편에 소개된 '영흥수목원'을 마음속에 저장하고 아드님이 차를 언제 두고 가시나 살피던 중 ㅋ 오늘 불현듯 충동이 일어 집을 나섰다. (라디오 음악방송에서 청명한 하늘을 즐기라고 부추긴 덕도 있다.) 버스와 전철, 택시를 타고 도착해 뙤약볕에 양산을 무기삼아 수목원으로 들어섰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과 쨍한 햇볕.. 하지만 꽃은 시들었고 나무도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단풍나무는 한두 잎이 퇴색했다. 환절기의 신산함이 수목원에도 고여 있었다. 인적 없는 고즈넉한 숲.. 앞서 간 젊은 커플에겐 반가울지 모르지만 나는 살짝 신경쓰였다.(무서웠다) 온실에 들어가니 이국적이고 신비한 식물들이 자태를 보인다. 바나나도 보이고, 노니는 몸에 좋다는 그것인가. '극락조화'라는 꽃은 어딘지 범접키 어려운 ..

삶, 그 풍경 2023.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