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78

좋은 詩

혐오가 나를 오염되게 하지 말라 /박노해 현실이 우리를 배반할지라도시대가 우리를 외면할지라도 환멸이 나를 소멸하게 하지 말며혐오가 나를 오염되게 하지 말며실망이 나를 무기력하게 하지 말며공포가 나를 잠식하게 하지 말며시간이 나를 시들게 하지 말지니 어둠 속에서도 내 눈동자는 빛나기를고난 속에서도 내 마음만은 푸르기를  차이콥스키 사계 중 10월

소식의 <적벽부>

1082년 가을 음력 7월 16일, 소동파 선생은 손님과 함께 적벽 아래 배를 띄워 노닐었지. 맑은 바람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은 잔잔하더군. 술 들어 손님에게 권하고, 시경 명월 시를 읊고, 요조의 장을 노래했네.  조금 지나니 달이 동쪽 산 위로 오르고, 두성과 우성 사이를 배회하더군. 하얀 물안개는 강을 가로지르고, 물빛은 하늘에 가닿는데, 갈잎 같은 작은 배를 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더니 끝없이 펼쳐진 물결 위를 넘어갔네. 넓고도 넓어라, 허공을 타고 바람을 몰아가 어디에 이를지 모르는 듯하여라. 나부끼고 나부껴라. 세상을 저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 돋친 신선 되어 하늘로 오르는 듯하여라.  바로 이때, 취기 어린 즐거움이 달아올라,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했지. 계수나무 노와 목란나무 상앗대로 물위에 ..

7월 장마 마광수

七月 장마 마광수 장마 가운데 내리고 싶다내 가슴속 엉긴 핏덩이좔좔좔 좔좔좔 씻어내리고 싶다.무엇이 두려우냐 무엇이 서러우냐뒤섞여 흘러가는 저 물 속에네 고독이 오히려 자유롭지 않으냐아아, 못생긴 이 희망, 못생긴 이 절망밤새워 뒤척이는 숨가쁜 꿈, 꿈들,빗줄기 속으로 씻겨져 내렸으면긴긴밤 보채 대는 끈끈한 사랑,제 미처 죽지 못해 미적이는 이 목숨,우우우 우우우 부서져 흘렀으면장마 가운데 내리고 싶다.내 껍질 모두 다 훨훨훨 빨가벗겨빗줄기에 알몸으로 녹아들고 싶다.

자서전 읽기 /허정열

앞선 사람의 등을 본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등이 산의 등줄기처럼 굽어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삶의 무늬가 느릿느릿 출렁인다. 한번도 소리 내어 목소리를 들려준 적 없는 등이 뒤뜽이며 말을 걸어온다. 수시로 흔들렸을 바람의 시간과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먹구름의 무게가 느껴진다. 고독과 외로움이 깃든 쓸쓸함이 덮여 있다. 정면으로 마주칠 때는 볼 수 없었던 사연들이 무딘 봉분처럼 숨어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층층이 쌓여 오래된 서가를 보는 듯하다. 등은 내가 써서 남에게 무료로 배부하는 한 권의 자서전이다. 길을 나서면 한 사람의 생을 유추하며 읽을 기회가 주어진다. 잠시라도 멈춰서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건 기다림이 있는 정류소나 대기실이다. 그것도 잠시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 ..

눈물 흘려도 돼 /양광모

비 좀 맞으면 어때 햇볕에 옷 말리면 되지 길가다 넘어지면 어때 다시 일어나 걸으면 되지 사랑했던 사람 떠나면 좀 어때 가슴 좀 아프면 되지 살아가는 일이 슬프면 좀 어때 눈물 좀 흘리면 되지 눈물 좀 흘리면 어때 어차피 울면서 태어났잖아 기쁠 때는 좀 활짝 웃어 슬플 때는 좀 슬피 울어 누가 뭐라 하면 좀 어때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이잖아 양광모 시인의 시, 은근 따뜻하다. 노래하듯 운율도 있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시처럼 쿨하게) 고난도 그렇게 털어내고 싶다. 조심스레 새해를 맞으며..

삶을 살아낸다는 건/황동규

다 왔다. 하늘이 자찬히 햇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히는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옷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 기침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와 둥치들을 내놓는다. 근육을 저리 바싹 말려버린 ..

잎사귀 하나/까비르

잎사귀 하나, 바람에 날려 가지에서 떨어지며 나무에게 말하네 '숲의 왕이여, 이제 가을이 와 나는 떨어져 당신에게서 멀어지네.' 나무가 대답하네. '사랑하는 잎사귀여,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라네. 왔다가 가는 것.' 숨을 쉴 때마다 그대를 창조한 이의 이름을 기억하라. 그대 또한 언제 바람에 떨어질지 알 수 없으니, 모든 호흡마다 그 순간을 살라.

산다 /다니카와 슌타로

산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곡조를 떠올린다는 것 재채기를 한다는 것 당신의 손을 잡는다는 것 산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짧은 치마 그것은 둥근 천장에 별들의 운행을 비춰 보는 것 그것은 요한 스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감춰진 악을 주의 깊게 거부하는 것 산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자유롭다는 것 산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고 있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커진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군인이 부상을 입는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는 ..

이성희 詩

(시집 서문) 겨울을 잘 모셔야겠다. 황량한 들녘, 그 텅 빈 풍요로움을 좀더 가슴속에 간직해야만 할 것 같다. 그 겨울의 끝에서 매화가 피는 소식을 아직도 더 기다려야겠다. 일획을 얻기 위하여 먼 울림을 얻기 위하여 언 손 호호 불며 좀더 견뎌야 하리라. 첫눈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아이가 잠든 사이에 내리는 눈처럼... 2012년 겨울 이성희 겨울 발신인 없는 적막을 내 온 적막으로 받는다 바람, 먼 겨울의 눈 덮인 침엽수림이 스쳐 지나간다 하늘에 끊어진 미로의 길들이 떠돌 때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눈이 그친 겨울 들녘에 서서 돌아보면 이 허공들이 온통 길이었을까 무한을 향하여 지도를 그리는 헐벗은 나무들 위에 눈 내리는 속도로 불면의 밤을 건너가는 우주의 소음 누군가의 나직이 아픈 숨소리 /이 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