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75

詩 3편

위험들 웃는 것은 바보처럼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우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일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꿈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것은 순진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는 것은 죽는 위험을 희망을 갖는 것은 절망하는 위험을 시도히는 것은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러나 위험은 감수해야만 하는 것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기에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못하므로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있을 ..

그리움의 총량 /허향숙 詩

그리움의 총량 무언가를 간절히 생각하고 슬퍼하는 시간의 총량이 고작 한 시간 정도라는 어느 시인의 진술을 수정하고자 한다 내 그리움의 총량은 의식과 무의식의 총체다 잠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책 볼 때도 폐북질할 때도 걸을 때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유행가를 부를 때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해가 뜨는 이유도 새가 지저귀는 이유도 바람이 동으로 가는 이유도 비가 사선을 긋는 이유도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는 이유도 별빛이 어둠을 가르며 내리는 이유도 풀벌레 우는 이유도 꽃이 피고 지는 이유도 웃음 한 말 빌려오는 이유도 숨을 고르는 이유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대기 낙엽처럼 깔려 있는 침울한 적요 흐느끼는 산길 널브러진 이끼들 어스름을 흔드는 개 짖는 소리 홀로 사그러지는 메꽃 매일 ..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아담 자가예프스키(폴란드 시인)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위안이 있다. 타인의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인데, 그러나 그 대신 서늘한 대화가 충실히 기다리고 있는 건 타인의 시에서뿐이다. 얼굴 저녁 무렵의 광장에서 빛나고 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나는 게걸스럽게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저마다 다른, 각자 뭔가를 말하고, 설득하고, 웃고, 아파하는 얼굴들을. 나는 생각했다, 도시는 집을 짓는 게 아니구나, 광장이나 가로수길, ..

11월의 양귀비꽃(현충일 즈음..)

플랑드르 들판에서 /존 맥크레이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 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이네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우리는 이제 유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랑드르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원수들과 우리들의 싸움 포기하려는데 힘이 빠져가는 내 손으로 그대 향해 던지는 이 횃불.. *존 맥크레이는 캐나다 출신 군의관으로 벨기에 이프레스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를 기리기 위해 이 시를 지었다 한다. 오전 10시..사이렌이 울린다.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세음에..

조정권 詩 '나도 수북이 쌓여'

문학예술사가 망했을 때다 거기서 나온 정한모 전봉건 이형기 정진규 문정희 옆에 나도 수북이 쌓여 강남 고속터미널 가판대 옆에 손님 기다리는 걸 보고 잠시 이런 광고문안이 기억났다 시집은 이럴 때 사용하셔도 아주 좋습니다 기름진 음식과 술을 많이 접하는 모든 분 고깃집 횟집 매운 요릿집, 미용실 병원 등 커피 대신 마실 분 귀한 손님 접대해야 하는 각 기업의 비서실 총무팀이나 연말연시를 맞아 직원들이나 협력업체 등의 선물용 반상회나 부녀회 학부모회 등 각종 모임 다과상에. 시 속에 들어 있는 좋은 성분들은 고지방 섭취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주고 특히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선물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아주 좋습니다

이정록 詩 머리맡에 대하여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 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 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 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 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 줄이 내려오고 금식 팻말이 나붙기도 했지요 ​ 2 지게질을 할 만하자 내 머리맡..

조정권 詩

떠도는 몸들 1. 뉴욕 소호에서 음주사한 화가 정찬승이 그림한테 이혼당하고, 귀국전을 연 전시장을 다녀왔다 그림은 한 점 보이지 않고 전시장 한가운데에 카페가 옮겨와 있다. 홍대에서 뜯어온 벽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생가에서 싣고 온 툇마루도 생생히 살아 있고 오그라진 화실 소파도 살아 있는 의자에 앉아 신문도 보고 낮잠도 자며 술 마시고 있다 이게 신성한 전시장인가 어리둥절해하는 하객과 시민들과 잡담하며 술 마시며, 그림 한 점 걸지 않은 전시장에 세상 술 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인간 한 점. 미리 보여준 삶의 폐업전. ....... 4. 아, 해외로 떠돌다가, 떠돌다가, 돌다가, 국내로 망명한 생들! 국내망명자들. 5. 발레리의 40년 고독 앞에 팔팔할 때 한번, 고개 숙여봤으면 됐다. 더이상 난 안 ..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조정권 시인)

하나. 새앙철 지붕 위로 쏟아지는 쇠못이여 쇠못 같은 빗줄기여 내 어린 날 지새우던 한밤이 아니래도 놀다 가거라 잔디 위에 흐느끼는 쇠못 같은 빗줄기여 니맘 내 다 안다 니맘 내 다 안다 내 어린날 첫사랑 몸져 눕던 담요짝 잔디밭에 가서 잠시 놀다 오너라 집집의 어두운 문간에서 낙숫물 소리로 흐느끼는 니맘 내 니맘 내 자알안다 나맘 내 자알안다 둘. 플밭에 떨어지면 풀들과 친해지는 물방울 같이 그대와 나는 친해졌나니 머언 산 바라보며 우리는 노오란 저녁해를 서로 나누어 가졌나니 오늘 먼 산 바라보며 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대의 무덤 빈 하늘 가득히 비가 몰려와 눈알을 메웁게 하나니 셋. 바람이여 네가 웃으며 내게 달려왔을 때 나무는 가장 깊숙한 빈터에서 흡족한 얼굴을 밝힌다 바람이여 네 지순한 손길이 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