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78

반추상 수필 /윤재천

반추상수필은 그 의미가 다의적이다. 수필은 형식이나 내용에 제한이 없는 글로 인식되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지만, 이런 인식이 수필의 어려움이기도 하고,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수필이 작가의 사실적인 모습이라는 선입견이 창작과정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수필의 이런 한계를 넘으려면 경계를 넘어 다양함을 토대로 발전하여 미래를 바라보는 수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능성을 막아놓고 무조건 '좋은 수필'의 출현만을 기대하고 있다. 이는 성장의 동력인 유전자 본체의 접속을 차단해 놓고, 수필의 깊이와 이해와 넓이가 불어나길 기대하는 일과 같다. 수필은 과감한 변신이 필요하며, 그 형식이나 문체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 기존 수필의 특징인 감성과 구상적 소재에서 발아한 글은..

정지용 시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어디러뇨 동녘에 피어 있는 들국화 웃어주는데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보노라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옛 추억 가슴 아픈 그 추억 더듬지 말자 내 가슴엔 그리움이 일고 나의 웃음도 년륜에 서겨졌나니 내 그것만 가지고 가노라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고향은 없어 진종일 진종일 언덕길 헤매다 가네 *이 시는 채동선이 곡을 쓰고 박화목 시를 붙여 으로, 이은상 시를 붙여 로 재탄생됐다.

반칠환 시/한평생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 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로 미뤄 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로 미뤄 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그 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詩 3편

위험들 웃는 것은 바보처럼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우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일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꿈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것은 순진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는 것은 죽는 위험을 희망을 갖는 것은 절망하는 위험을 시도히는 것은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러나 위험은 감수해야만 하는 것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기에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못하므로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있을 ..

그리움의 총량 /허향숙 詩

그리움의 총량 무언가를 간절히 생각하고 슬퍼하는 시간의 총량이 고작 한 시간 정도라는 어느 시인의 진술을 수정하고자 한다 내 그리움의 총량은 의식과 무의식의 총체다 잠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책 볼 때도 폐북질할 때도 걸을 때도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유행가를 부를 때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해가 뜨는 이유도 새가 지저귀는 이유도 바람이 동으로 가는 이유도 비가 사선을 긋는 이유도 구름이 하늘을 흐르게 하는 이유도 별빛이 어둠을 가르며 내리는 이유도 풀벌레 우는 이유도 꽃이 피고 지는 이유도 웃음 한 말 빌려오는 이유도 숨을 고르는 이유도 온통 너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대기 낙엽처럼 깔려 있는 침울한 적요 흐느끼는 산길 널브러진 이끼들 어스름을 흔드는 개 짖는 소리 홀로 사그러지는 메꽃 매일 ..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아담 자가예프스키(폴란드 시인)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위안이 있다. 타인의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인데, 그러나 그 대신 서늘한 대화가 충실히 기다리고 있는 건 타인의 시에서뿐이다. 얼굴 저녁 무렵의 광장에서 빛나고 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나는 게걸스럽게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저마다 다른, 각자 뭔가를 말하고, 설득하고, 웃고, 아파하는 얼굴들을. 나는 생각했다, 도시는 집을 짓는 게 아니구나, 광장이나 가로수길, ..

11월의 양귀비꽃(현충일 즈음..)

플랑드르 들판에서 /존 맥크레이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 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이네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우리는 이제 유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랑드르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원수들과 우리들의 싸움 포기하려는데 힘이 빠져가는 내 손으로 그대 향해 던지는 이 횃불.. *존 맥크레이는 캐나다 출신 군의관으로 벨기에 이프레스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를 기리기 위해 이 시를 지었다 한다. 오전 10시..사이렌이 울린다.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세음에..

조정권 詩 '나도 수북이 쌓여'

문학예술사가 망했을 때다 거기서 나온 정한모 전봉건 이형기 정진규 문정희 옆에 나도 수북이 쌓여 강남 고속터미널 가판대 옆에 손님 기다리는 걸 보고 잠시 이런 광고문안이 기억났다 시집은 이럴 때 사용하셔도 아주 좋습니다 기름진 음식과 술을 많이 접하는 모든 분 고깃집 횟집 매운 요릿집, 미용실 병원 등 커피 대신 마실 분 귀한 손님 접대해야 하는 각 기업의 비서실 총무팀이나 연말연시를 맞아 직원들이나 협력업체 등의 선물용 반상회나 부녀회 학부모회 등 각종 모임 다과상에. 시 속에 들어 있는 좋은 성분들은 고지방 섭취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주고 특히 값이 저렴하기 때문에 선물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아주 좋습니다

이정록 詩 머리맡에 대하여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 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 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 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 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 줄이 내려오고 금식 팻말이 나붙기도 했지요 ​ 2 지게질을 할 만하자 내 머리맡..

조정권 詩

떠도는 몸들 1. 뉴욕 소호에서 음주사한 화가 정찬승이 그림한테 이혼당하고, 귀국전을 연 전시장을 다녀왔다 그림은 한 점 보이지 않고 전시장 한가운데에 카페가 옮겨와 있다. 홍대에서 뜯어온 벽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생가에서 싣고 온 툇마루도 생생히 살아 있고 오그라진 화실 소파도 살아 있는 의자에 앉아 신문도 보고 낮잠도 자며 술 마시고 있다 이게 신성한 전시장인가 어리둥절해하는 하객과 시민들과 잡담하며 술 마시며, 그림 한 점 걸지 않은 전시장에 세상 술 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인간 한 점. 미리 보여준 삶의 폐업전. ....... 4. 아, 해외로 떠돌다가, 떠돌다가, 돌다가, 국내로 망명한 생들! 국내망명자들. 5. 발레리의 40년 고독 앞에 팔팔할 때 한번, 고개 숙여봤으면 됐다. 더이상 난 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