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자서전 읽기 /허정열

아데니움 2024. 3. 8. 14:21

  앞선 사람의 등을 본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등이 산의 등줄기처럼 굽어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삶의 무늬가 느릿느릿 출렁인다. 한번도 소리 내어 목소리를 들려준 적 없는 등이 뒤뜽이며 말을 걸어온다. 수시로 흔들렸을 바람의 시간과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먹구름의 무게가 느껴진다. 고독과 외로움이 깃든 쓸쓸함이 덮여 있다. 정면으로 마주칠 때는 볼 수 없었던 사연들이 무딘 봉분처럼 숨어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층층이 쌓여 오래된 서가를 보는 듯하다. 등은 내가 써서 남에게 무료로 배부하는 한 권의 자서전이다.

  길을 나서면 한 사람의 생을 유추하며 읽을 기회가 주어진다. 잠시라도 멈춰서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건 기다림이 있는 정류소나 대기실이다. 그것도 잠시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 고요하게 들썩이는 등을 훑어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압축된 과거와 역사가 담긴 등을 잠깐이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고요하고 은밀한 설법으로 누구나 주술에 걸린 둣 읽게 되는 거리의 독서법이다. 음독으로 소리내어 읽기에는 주위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윤독에는 몇 사람의 호흡이 필요해 거리의 독서로는 적합하지 않다. 암독하기에는 몇 번식 읽어  외우거나 내 것으로 만들 시간이 부족하다. 걸어가는 등을 읽을 때는 속독을 하면서 발췌독을 하는 게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다. 읽고 싶은 부분만 뽑는 기술은 속독과 병행해야 한다.

  작은 몸에 가장 큰 품을 가진 등, 내 몸에 기거하면서 마주할 수 없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미루어 짐작하고 남의 말을 빌려 대신 채워넣기도 하는 고립무원의 유일한 장소다. 굽은 목등뼈를 지나 허리뼈로 향하는 갈비뼈를 덮고 있는 등. 서럽도록 집착했던 어느 계절의 아픔도 어깨와 어깨 사이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남과 북처럼 앞과 뒤라는 이름으로 경계가 분명하지만, 균형 잃지 말라고 받쳐주는 침묵 속에는 배려가 깃들어 있다. 뒷전이라 투덜대지 않고 내세우지 않는 겸손도 함께한다.

  담백한 듯 보이지만 느닷없이 말을 걸어오는 등의 채근을 느낄 때가 있다. 굴곡진 삶의 내력을 흐르지 않게 켜켜이 잘 눌러 놓은 곳이 등이다. 등줄기에서 읽는 삶의 가닥이 소름을 돋게 할 때도 있다. 고단한 삶의 무게와 절망과 환희의 시간이 머물러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덤덤한 척 냉정하게 보이려 애써도 험난했던 지난 시간을 짐작하게 한다. 가슴속에 꼭꼭 가둔 비명의 날도 넘어와 닿아 있을 것이다. 아직 해독이 안 된 기호 같은 삶의 모습도 구부러진 등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슬픔과 아픔의 열매가 열렸다 사라질 때마다 등은 얼마나 많은 근심과 걱정을 채웠을까. 가뭄처럼 타들어가는 가난에 갈래갈래 갈라진 가슴을 지켜보며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함께하며 속을 태웠을까.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약을 바르고 파스를 붙여주어야 하지만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답답함을 참아내는 곳, 내 몸의 일부지만 비밀창고 하나 없는 민둥산이어서 더욱 안타깝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등. 점점 나의 뒤쪽이 궁금해진다. 내 손으로 관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치장할 수 없도록 철저히 소외된 지역이어서 더욱 그렇다.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쓸쓸함이 찰랑거릴 때 홀로 막고 버텨주는 바람벽이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마감해야 하는 삶이 억울해 이력을 축적해두었을까. 나의 등에도 수많은 밀물과 썰물의 시간이 포개져 있을 것이다. 나의 일상을 지지하고 받쳐준 배려와 과묵함의 집합소로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어 진솔하게 쓴 자서전이다. 말은 머리의 언어이고 침묵은 가슴의 언어라고 하지 않던가. 등은 말 대신 쌓은 한 사람의 삶을 가슴으로 풀어놓은 언어창고이다.

  삶이란 때론 원하지 않아도 걸어야 하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때가 있다. 언제나 예측불가한 삶을 건너면서 소홀히 대할 때도 등은 묵묵히 견뎌내며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보이지 않은 등에는 생각하게 하는 말줄임표가 숨어 있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등이 더욱 쓸쓸하게 보였던 것도 욕망이 큰 만큼 외롭고 쓸쓸함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뒤척일 때마다 신음이 닿아도 성급하게 맞서지 않고 쓸쓸하게 견딘 인내를 짐작하게 한다.

  맵고 짜고 팽팽했던 긴장에서 놓여나고 싶을 때 뭉친 근육들이 뻐근하게 말문을 튼다. 삶의 무늬로 외치는 소리 없는 진술서, 소란스럽지 않게 과묵하게 써내려간 등의 기록. 살아온 순리대로, 읽는 자의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는 열려 있는 한 권의 책에는 희로애락이 압화처럼 눌려 있다.

                                                                                                   / 2024 <The 수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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