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소현의 영화와 음악이야기

폐부를 찌르는 쓸쓸함

아데니움 2023. 9. 12. 10:00

폐부를 찌르는 쓸쓸함

-영화 길(La Strada)과 니노 로타-

 

김소현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환절기는 두렵다.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과는 분명 다른 신산함이 있기에.

그 쓸쓸함을 닮은 소리가 있다. 니노 로타의 영화음악에서 흐르는 트럼펫이다. 트럼펫은 시끄러운 악기라고만 생각했었다. 군대에서 기상과 취침시간을 알리는 단순한 나팔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랜 기간 트럼펫을 외면하고 음색이 비슷하면서도 부드러운 플루겔 혼을 자주 들었다. 척 맨지오니 내한공연을 보고나선 더욱 그랬다. 최근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 연주를 듣고서야 그 소리의 매혹을 알게 됐다. 고독한 남자의 독백 같은 애잔한 소리라니.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처럼 때로는 힘을 주기도 하는 매력적인 악기다.

이탈리아 영화음악가 니노 로타(1911~1979)는 영화 <La Strada><태양은 가득히>에서 독보적인 트럼펫의 선율을 들려줬다. 1954년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각본과 제작, 감독을 맡은 영화 <La Strada>에서 그 쓸쓸한 소리는 틈틈이 흐른다. 영화 팬들 가슴 속에 깊은 감명을 준 스토리와 음악이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낡은 삼륜차에 자신의 이름 Zampano라 써진 천막을 치고 여기저기를 떠도는 차력사 잠파노(안소니 퀸). 데리고 다니던 조수가 죽자 해변에서 그 가족을 만나 돈 몇 푼을 주고 그녀의 동생인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를 데려온다. 생계를 위해 가족을 떠나 잠파노와 동행하게 된 젤소미나는 짧은 머리에 왜소한 체구, 해맑은 미소를 지닌 순진무구한 처녀다. 잠파노는 겁먹은 표정의 그녀를 조수로 쓰기 위해 매질도 불사하며 악기와 기타 등등을 가르친다. 잠파노가 차력으로 몸에 감은 쇠사슬을 끊을 때 그녀는 북을 치며 흥을 돋우고 돈을 걷는다.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성적 욕망을 채우는 잠파노, 존중받지 못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순수하게 그를 좋아하며 그와의 결혼을 꿈꾸는 젤소미나, 그녀가 부는 트럼펫(젤소미나의 테마)은 늦가을의 낙엽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속울음 같은 소리가 트럼펫을 통해 흐른다.

두 사람은 어느 서커스단에서 일하게 되고 그곳에서 마토라는 광대를 알게 된다. 마토가 젤소미나에게 잘해주자 잠파노는 질투인지 모를 감정으로 마토와 충돌한다. 훗날 우연히 마토를 만난 잠파노는 의도치 않게 그를 죽이게 되고 충격을 받은 젤소미나는 정신을 놓는다. 잠파노는 쓸모없게 된 그녀를 길에 버린다. 잠든 그녀 옆에 트럼펫을 두고.

몇 년 후,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공연을 끝내고 밤길을 산책하던 잠파노는 어디선가 젤소미나가 즐겨 불던 멜로디를 듣는다. 그는 여인에게 그 노래를 어디서 알았냐고 다그친다. 노래를 흥얼거리던 여인은 자기 아버지가 이상한 여자를 해변에서 데려왔는데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한다. 그 밤 잠파노는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술에 취해 폭력적인 행동을 하며 울부짖는다. 처절한 고독을 느끼며 회한의 눈물을 쏟는 그는 그제야 젤소미나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소중한 것을 잃고 난 후에야 깨닫는 인간의 어리석음. 해변에 쓰러져 흐느끼는 잠파노를 연민하듯 파도가 잔잔히 철썩인다.

 

영화에서 젤소미나는 배우가 아닌 그 자체의 사람처럼 보였다. 한없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그녀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재원이고 감독의 아내임을 알고 왠지 안도감을 느꼈다. 이후 <라 스트라다>는 가사가 붙어 샹송과 팝으로 불렸다. 영화 <La Strada>은 말이 필요 없는 수작으로 페데리코 펠리니에게 처음으로 아카데미상을 안겨줬다. 영화의 배경은 가난과 어둠이지만 음악으로 인해 낭만과 서정이 잘 어우러진 영화다. 유랑이라는 어휘와 낡은 삼륜차에서 풍기는 쓸쓸함이 그득한.

니노 로타의 또 하나의 트럼펫, <태양은 가득히>주제곡 Plein Soleil은 주인공 알랑 들롱의 아름답고 슬픈, 그러면서도 어딘지 불온해 보이는 눈의 안광 같은 선율이다. 그가 배에서 친구를 죽이고 지중해보다 더 파란 눈동자로 배의 키를 잡고 항해할 때 트럼펫이 울린다. 신분 상승 욕구로 부자인 친구를 죽이고 친구의 이름으로 가짜 인생을 위태롭게 사는 알랑 들롱, 선율만으로 슬픈 서사가 느껴지는 음악은 관객이 범죄자인 주인공을 연민하는 소리 같다.

영화<대부>Speak Softly Love의 선율은 트럼펫은 아니지만 사나이들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 속에서 처연히 흐른다. 정장을 하고 총질을 해대는 비정한 남자들의 모습, 잔혹한 느와르마저 아름답게 승화시킨 선율이기에 아카데미에서도 음악상을 주었다.

셰익스피어 원작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피지 못하고 져버린 청춘의 덧없음을 음악으로 전했다. 테마곡<A Time for us -What is a Youth 청춘이란 무엇인가>는 두 어린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명곡 중의 명곡이다.

니노 로타는 클래식을 전공한 작곡자였지만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을 만난 후 영화음악가로 변신한다. 그 스스로 영화는 취미일 뿐이라 말했다지만 그는 이미 영화음악의 거장이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음감으로 음악공부를 했고 문학과 철학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다.

라디오를 함께 듣는 음악 벗들은 니노 로타가 나오면 나를 찾는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인의 연인이라면 니노 로타는 나만의 연인이다. 감성이 통한다는 건 축복이다.

 

(좋은수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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