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소현의 영화와 음악이야기

러시아 서정

아데니움 2022. 4. 12. 12:43

러시아 서정

 

 

김 소현

 

 

 

소현 님 좋아하는 곡이네요

라디오 음악방송에서 올드 로망스가 나오자, 게시판의 몇 사람이 올린 반응이다. 러시아 음악이 나올 때마다 내가 좋아요누른 걸 기억한 거다. 올드 로망스는 푸쉬킨 원작소설 <눈보라> 영화에서 흐른 곡이다. 눈 내리는 거리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애틋하게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는 남녀의 모습과 흐르는 곡이 듣는 이의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애끓는 슬픔이 담긴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제자인 작곡자 스비리도프가 만든 9개의 곡 중 여섯 번째 곡이다.

러시아 로망스는 18세기 말 경 사랑과 이별, 인간의 영혼과 자연을 주제로 쓴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우리나라 가곡과 비슷한 대중음악이다. 귀족들의 전용음악으로 사랑받아오다 서서히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졌지만 부르주아 음악이라 핍박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 음악은 왜 슬픈 걸까. 대부분 단조인 그들의 음악은 그래서인지 특유의 애수가 느껴진다. 슬픈 곡조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는 타고난 성정이기도 하지만 웃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던 내 삶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음악듣기에도 변천사가 있어 한때는 포르투갈의 파두(Fado)에 빠졌었는데 두 나라 음악이 만만치 않게 슬프다. 그것은 분명 나라의 운명과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몇 년 전 북유럽 여행길에 모스크바 공항에 들르게 됐다. 그때 나는 남다른 설렘을 가졌었다. 그들의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였다. 안톤 체홉, 톨스토이, 차이콥스키, 안나 카레니나, 닥터 지바고,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심지어 KGB에 대한 환상까지. 그러나 공항은 작고 지저분했으며 사람들은 차갑고 무표정해서 이미지가 좋지 않았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것은 오랜 기간 몽골의 압제를 받으며 우울한 동양적 정서가 그들의 몸에 배어서라 한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문화 예술의 도시 상트 페테르브그 아르바트 거리에서 푸쉬킨 동상을 물끄러미 바라본 기억이 난다. 그는 왜 38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 그의 아내는 나탈리아 콘차로바로 뛰어난 미모를 지닌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황제인 니콜라이1세조차 그녀를 가까이에 두고 보려고 푸쉬킨을 시종으로 두었다 한다. 문제는 그녀와 조르주 단테스라는 프랑스 장교의 염문이었다. 그런 내용이 담긴 투서가 날아들고 푸쉬킨은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는데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그때 그의 총구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던 상황과 여러 가지 문제들이 그를 자살로 이끌었을 거라 유추해 본다. 러시아 오페라엔 푸쉬킨 원작이 많다. 러시아인들은 푸쉬킨을 성서 다음으로 중요시 여긴단다. ‘우리의 모든 것이라 칭송하며 추앙한다.

문화는 경작하는 거라 한다. 작물을 심고 정성껏 가꾸는 농부처럼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킨다는 뜻이리라. 러시아인들은 겨울엔 극장으로 달려가 남은 연극표가 없다는데 그들의 공감문화를 알 수 있는 풍경이다. ‘눌린 용수철같은 염세주의를 가진 러시아 사람들. 정신적으로는 우월하지만 물질적으로 열등한 그들의 삶의 방식은 동양이고 외모는 서양인이다. 정체성에 혼란을 가질 만하다. 러시아에 인상파 화가가 없는 이유는 자연을 그릴 여유가 없어서라 한다.

러시아를 대변하는 말이 있다. 40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 영화 40도의 날씨, 40도의 술이다. 면면한 역사와 강인한 생명력, 역경을 헤쳐 온 불굴의 힘을 가진 러시아, 선 굵은 문화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그들이, 그 문화가 부럽다.

슬라브 민족의 감성은 슬픔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나는 발랄라이카에 실린 그들의 우수를 사랑할 것 같다. 라디오에서 라라의 테마, 머나먼 길, 검은 눈동자, 나 홀로 길을 걷네, 백만 송이 장미 같은 곡이 나오면 좋아요를 꾸욱 누르며.

트로이카(삼두마차)를 타고 설원을 달리며 러시아의 서정을 좇는, 바쁘지 않은 여행을 다시 하게 될 날을 꿈꿔본다.

 

 

<좋은수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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