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소현의 영화와 음악이야기

재즈 음감회

아데니움 2020. 5. 31. 13:20

 


가을비가 낙엽처럼 처연히 내리는 밤, 음악 하나를 찾아 듣는다. 줄리 런던의 Round Midnight….
눈을 감고 음률에 젖어든다. 재즈의 스테디셀러 같은 이 곡은 1940년대에 활동한 비밥재즈의 대표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 곡이다. 여러 뮤지션이 불렀고 팝처럼 대중화된 지 오래다. 오늘은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
요즘 재즈를 자주 듣는다. 클래식과 팝, 영화음악은 꾸준히 듣고 있지만 재즈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극히 적었다. 내가 좋아하는 재즈 뮤지션은 한국의 말로와 박성연, 엘라 피츠제럴드, 마할리아 잭슨, 니나 시몬 정도였다. 일 년 전쯤 인터넷 재즈밴드에 가입하여 음악을 들으면서 많은 뮤지션과 곡을 알게 됐다. 그 중 웨스 몽고메리 기타에 푹 빠졌다. 그는 1966년과 69년에 그래미상 재즈부문에서 수상한 기타리스트이다. 아내를 위해 자주 연주했다는 그의 핑거링에서 나오는 음은 뭔가 따스하다. 그리고 재즈곡에서 각별하게 들리는 베이스를 사랑하는데 찰리 헤이든의 베이스가 그렇다.


재즈음악을 듣는 밴드에서는 2018년 4월부터 성북동에 위치한 리홀 뮤직갤러리에서 장르별로 재즈음악 감상회를 가져왔다. 밴드에 가입한 지 일 년쯤 됐지만 멀어서 포기하곤 했던 그곳을 작심하고 찾았다. 10월엔 그 마지막 회로 영화 속 재즈였다. 귀차니스트인 내가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그 먼 곳을 찾아간 이유는 오직 음악에 대한 욕심 하나였다. 갤러리는 성북동 한적한 동네에 신기루처럼 하얗게 자리해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음악과 관련한 소품들과 축음기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꽤 넓은 공간 양 벽에 빽빽하게 엘피판이 꽂혀 있어 그것을 수집했을 누군가의 열정에 탄복했다.
적요한 동네 풍경과 달리 그곳에는 재즈를 들으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새 많이 모여 있었다. 갤러리 사장이 무료로 장소를 빌려준다 한다. 아마도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은발의 그가 점잖게 인사를 하고 퇴장한 후, 아리따운 갤러리 실장이 나와 스피커 자랑을 하며 인사한다.
리더의 진행으로 영상을 보며 10편의 영화 소개와 재즈로 변신한 OST를 들었다. 귀에 익은 영화음악들이라서 더 친숙하게 들렸다. 실장이 스피커 자랑을 왜 했는지 이해가 됐다. 머릿속 한편엔 집에 돌아갈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산 넘고 물 건너' 간 보람이 있었다.
나는 클래식과 영화음악을 재즈화한 곡들에 관심이 많다.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다이나 워싱턴이 부른 I'll Close my eyes는 스팅이 부른 곡과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 테마곡 I'll Wait For You도 프랑스 영화음악 작곡자 미셸 르그랑의 피아노 연주 한 곡에 몇 장르의 리듬이 있는 매력 있는 곡이다. 영화 <조커>에 흐른 Smile은 찰리 채플린 곡으로 영화 내용과 달리 우아한 선율이 영화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재즈는 클래식이나 팝송, 그 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없는 ‘소울(Soul)’이 느껴지는데, 난해하면서도 자유롭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감동을 준다.
흔히 재즈를 흑인음악으로 알고 있는데…, 오래전 미국 뉴올리언즈 일대에는 프랑스 백인남자와 흑인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크레올)이 살았다 한다. 그들이 생계를 위해 악단을 조직하고 아프리카 음악에 유럽의 기법을 접목하여 연주하기 시작한 음악이 오늘의 재즈에 이르렀다. ‘생계’를 위한 음악(예술)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그래서 재즈를 흑인음악이라 하는지도 모른다. 1930년 경 스윙재즈로 시작한 재즈는 비밥재즈, 쿨 재즈, 프리재즈, 퓨전재즈로 이어져 점점 예술음악으로 승화했다. 쿨 재즈의 대표주자가 한국의 조용필 같은 마일스 데이비스이고, 90년대에는 팻 매스니가 기타연주로 퓨전재즈를 알렸다.



재즈평론가 남무성이 직접 그리고 쓴 만화형식의 책 <재즈 잇 업>은 초보자들도 쉽게 볼 수 있는 재즈 입문서다. 내용도 알차고 일단 재미있다. 얼굴은 ‘차도남’ 스타일인데 유머가 상당하다. 보는 내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일본 재즈 매거진 <스윙 저널> 편집장 미츠모리 타카후미는 2005년 1월호부터 그 잡지에 <재즈 잇 업>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한다. 충실하게 그려진 재즈사와 그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저자가 재즈 역사의 배경에 있는 ‘빛과 그림자’까지 저널리스트의 관점으로 묘사해낸 걸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나는 책에 소개된 재즈 명반 50선을 유튜브로 들어보고 마음에 들어오는 몇 곡을 블로그에 옮겨 듣고 있다.
‘재즈를 듣는 일은 외로운 일이다. 듣는 만큼 자아와 소통하는 방법에 길들여진다'고 작가는 말한다. 혼자서 음악을 즐기는 내게 하는 말 같다. 음악을 글로 알려주고 귀로 듣게 해 주는, 앞서가는 누군가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들 아니었으면 빌 에반스와 키스 자렛의 피아노, 쳇 베이커의 블루지한 노래와 트럼펫, 보사노바의 대가 후안 질베르토, 존 콜트레인과 스탄 겟츠의 섹소폰을 어찌 알았겠는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시절 Swing이라는 재즈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재즈를 익혔다 한다. 그는 훗날 자신의 재즈카페 ‘피터 캣‘을 열어 50년대 재즈를 70년대 손님들에게 들려줬다. 그는 자신의 대부분의 작품에 음악을 넣어 독자인 내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다. 조승원이라는 모 방송국 팀장이 쓴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 라는 책에는, 하루키가 사랑한 음악과 술의 종류, 그 조주법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꿈이 있다면 나만큼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와 지금도 영업 중이라는 하루키 책 속의 재즈카페를 순례하는 거다. 그가 소개한 책 속의 음악을 듣고 술도 맛보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그런데 그런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

 

(2020 현대수필 여름호 문화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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