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소현의 영화와 음악이야기

지중해의 '저녁노을'

아데니움 2022. 5. 9. 10:12

지중해의 저녁노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Im Abendrot-

 

                                                                                                                                 김소현

 

 

주말 밤, 텔레비전에서 신비스런 시그널 Alma Mater가 흐르고 고요한 스튜디오에 폴 윈터의 Winter's Dream이 은은히 깔리면, 파리지엔 풍모의 한 은발신사가 정제된 어조로 영화와 음악을 소개한다. 가슴 설레며 그 공간으로 빨려들어 간다. 다양하고 때로는 테마가 있는 영화와 음악이 있는 그 곳에서 잠시 감성에 젖는다.

영화 <Trip to Italy>가 소개될 때 바다 위를 미끄러지는 배와 절묘하게 흐르는 배경음악에 마음이 일렁였다. 거침없이 찌르는 듯한 도입부의 첫 음은 회색빛 대기에 한 줄기 빛을 비추듯 전율이 일었다. 음악 덕분에 찾아본 영화가 한둘이던가. 서둘러 영화를 검색했다.

잡지사의 제안으로 영국에서 이태리로 여행 온 두 남자 (코미디언과 방송인)는 일주일 동안 이태리 북부 피에몬테에서 시작해 카프리까지 여섯 도시를 방문하며 끊임없이, 유쾌하게 인생이야기를 나눈다. 두 남자는 바닷가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그야말로) 먹고 마시며 현지 여인과 사랑도 나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처럼.

그들이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Im Abendrot -저녁노을이 배경으로 흐른다. 이 곡의 백미는 도입부인데 들을 때마다 환희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감동으로 뭉클해진다. 마음 상태와 처한 상황에 따라 음악이 다르게 들리듯, 아마도 (여행 못 가는) 답답한 요즘의 일상에 대리만족으로 다가와서인지도 모른다.

좁고, 높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곡예 하듯 달리는 작은 차를 보며 그들의 여정이 몇 년 전 나의 이태리 남부 섬 여행 일정과 비슷한 걸 알았다. 해안가 절벽 위의 집들은 오래전 적의 침공을 막기 위해 그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데 여행자인 내 눈엔 운치 있게만 보였었다. 캄파니아 베수비오 화산의 돌길을 걸을 때도 마치 함께 걷는 듯 생생했고, 화산 꼭대기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워보이던 폼페이 시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던 기억도 엊그제 일 같았다.

도입부만 잠깐씩 들리던 저녁노을은 그들이 리구리아를 방문할 때 비로소 제시 노먼의 목소리까지 들린다. 심장에 손을 얹고 감상에 빠진다. 두 남자의 유쾌한 수다에는 영국 시인 바이런과 셸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두 시인의 이태리로의 망명을 상징했다 한다. 두 여행객의 대화 중 슬픔은 앎이다’ ‘사진 한 장은 글자 천 자와 같다는 말이 여운으로 남았다.

이태리의 풍광과 두 사람의 대화만 있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겉도는 느낌도 들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는 아말피를 지날 때는 서로 어우러져 환상이었다.

저녁노을은 독일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며 교향시의 거장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가 독일 서정시인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인 성악곡이다. 이 곡은 소프라노 가수인 아내 파울리네를 위해 만든 4개의 노래 중 마지막 곡으로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이다. 내 귀엔 블랙 디바제시 노먼 목소리에 최적화된 노래로 들린다. 곡이 바다와 어울리는 느낌은 슈트라우스가 병을 얻고 요양 차 지중해로 떠났을 때 이 곡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유추하게 한다. 죽음을 준비하며 만들었다는 해석처럼 고독과 우수, 회상이 담겨 있으면서도 밝고 아름답다. 아내에 대한 사랑과 모든 걸 내려놓은 초월적 마인드가 담긴 건 아닐지.

푸른 바다와 낮게 떠 있는 구름, 유유자적 미끄러지는 돛배, 그 위를 흐르는 소프라노의 저녁노을,더 이상 어떤 수식이 필요할까. 그 순간엔 시름도 잊힌다. 음악을 듣다보면 운명처럼 가슴에 콕 박히는 곡이 있다. 영화의 격을 높여주는 음악도 있다. 슈트라우스의 이 곡이 그런 듯하다.

 

 

우리는 슬픔도 기쁨도 손을 맞잡고 견디어 왔다.

이제 방황을 멈추고 저 높고 고요한 곳에서 안식을 누리리.

주위의 계곡은 깊게 패이고 사방은 어둠이 가득 찼네.

다만 두 마리 종달새가 아쉬움을 쫓아 저녁 안개 속을 날아오르네.

이리로 물러서 그들이 노래하도록 내버려두세.

곧 잠들 시각이니 외로움 속에서도

우리 방황하지 않으리 오 넓고 조용한 평화여

저녁노을 속에서 우리 피로로 지쳐 있네

이것이 아마 죽음이 아닐까 /아이헨도르프 <저녁노을>

 

 

<좋은수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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