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미라보 다리의 그녀, 마리 로랑생

아데니움 2018. 6. 21. 11:36



                 미라보 다리의 그녀- 마리 로랑생
                                  
                                                                                                                                김 소현


  


   어스름이 안개처럼 스미는 저녁,

   한 남자가 미라보 다리 난간에 기대어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1860년 경 노르망디 작은 어촌마을에 살던 스무 살 처녀는 꿈을 안고 파리로 오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생존을 위해 가정부와 식당 종업원을 전전하던 어느 날, 외로움과 삶에 지친 그녀에게 한 유부남이 나타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후 그녀는 딸을 낳고 숨겨진 여인으로 조용히 살게 된다.
  세월이 흐르고 그 딸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아버지 없이 외롭게 성장한 딸 마리 로랑생은, 교사가 되어 조용히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외면하고 ‘아카데미 앙베르’라는 회화연구소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다. 
  그녀는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인 ‘세탁선(Le Bateau Lavoir)’이라는 공간에서 활동하며 피카소, 마티스, 장 콕토, 모딜리아니 같은 사람들과 교류한다. 그녀는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그림을 그리며 서서히 입지를 굳혀 가는데 ‘몽마르트르의 뮤즈’로 불리던 그녀에게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쇄도한다.
  그 즈음 마리는 피카소의 소개로 만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에 빠진다. 아폴리네르 역시 사생아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연민하며 영혼의 동반자가 된다. 그러나 아폴리네르가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돼 있던 ‘모나리자 절도사건’에 연루되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식는다. 마리가 그를 떠난 것이다. 그녀에겐 이별의 이유가 필요했던 걸까. 5년 여 동안 사귄 연인을 오해하여 떠났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녀가 떠난 후 아폴리네르는 친구인 샤갈에게 찾아가 술을 마시며 괴로움을 토로한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는 미라보 다리에 기대서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많은 샹송가수들이 노래로 부른 시 <미라보 다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아폴리네르는 마리를 생각하며 그 시를 썼지만 그녀가 유일한 사랑은 아니었다. 마리는 단지 그의 마지막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와 헤어진 후 마리는 독일 귀족과 결혼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부부는 스페인으로 망명한다. 이후 남편은 술독에 빠지고 부부생활엔 검은 구름이 낀다. 마리는 개와 고양이를 곁에 두고 외로움을 달래며 고국을 그린다. 우울한 내면을 대변하듯 그때 그녀의 그림엔 회색배경이 많았지만 점차 화폭을 핑크색으로 물들이며 희망을 그린다.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마리는 독일에 가 있던 남편과 이혼한다. 그의 술 문제가 이유라 하지만 이미 연소된 사랑의 불꽃이 결혼생활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 사이 전쟁터로 떠난 아폴리네르는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머리 부상으로 38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한다.


 마리로랑생전시회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영원히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그의 죽음 후 마리는 슬픔을 달래며 작품에 몰두한다. 그림뿐 아니라 패션과 도서 일러스트에도 재능이 있던 그녀는 러시아 무용단의 의상을 제작하고 무대장치를 연출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56년 72세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그녀를 만났다. 1883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화가와 시인으로 활동했던  마리 로랑생….
  작품들은 청춘시대, 열애시대, 망명시대, 열정시대의 섹션으로 나뉘어 전시돼 있었다. 각 섹션마다 벽 색깔이 다른 것은 작품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전시자의 정성이라 할까.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의 작품과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선이 가늘고 핑크와 그레이, 블루를 주조로 한 파스텔 색감의 작품들에서 100년  전 그림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감각적인 심미안을 엿볼 수 있었다. 여자와 소녀, 꽃과 동물들이 사각의 틀 속에서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풍겼다. 차분하고 섬세한 느낌이 예술가로서, 한 여성으로서의 미묘한 내면을 말해주는 듯했다.
  아버지의 존재 때문이었을까. 남자에 대한 거부감일까. 그녀의 그림엔 남자가 없다. 그래서인지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의혹도 받았다 한다. 연애와 결혼, 전쟁, 망명, 그리고 이혼을 겪으며 그녀의 작품은 점점 깊어진다.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개성이 강하고 어딘지 사색적으로 보이는 얼굴의 그녀는 <밤의 수첩>이라는 문집을 내기도 했는데, '잊혀진 여인'으로 번안된 그녀의 시 <진정제-Le calmant>'는 나를 포함한 한국인의 애송시다.
  그림 뒤로 슬픔과 고독, 착잡한 내면을 화폭에 투사하며 색채와 씨름하는 한 여인이 보였다. 미를 사랑한 그 예지의 여인을 떠올리며 연민의 감정이 솟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이 ‘잊혀진 여인’이라 했던가. 그러나 그녀, 마리 로랑생은 잊히지 않았다.



                                                                                    < 현대수필 여름호 문화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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