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독한 귀차니스트의 일기

아데니움 2020. 5. 31. 13:16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산다. 사은품으로 받은 책자에 가수 이 적의 두 번째 책 출간 기념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그의 말 중 '늙지만 말고 놀기도 하자'란 말이 좋아서 대화 방에 올렸는데 다음날 자세히 보니 놀기도가 아니고 기도였다. 어쩐지 말이 좀 이상하다 했다.

점잖은 이 적이 놀겠다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걸까. 의미가 크게 다른 말을 버젓이 올려놓고 태평했다. 나이 탓이란 변명은 하지 말자. 뭔가를 제대로 보지 않고 대충 내가 보고 싶은 것으로 판단하는, 참 어이없고 무책임한 행태에 나 자신 놀랐다.

나는 그렇게 놀고 싶었던가. 아니면 노는 것을 합리화하고 싶었던 건가. 나태주 시'풀꽃'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쁜 게 아니고 자세히 보아야 잘 보인다. 그것은 비단 글씨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도 대체로 자신이 보고 싶은 점만 보게 되지 않던가. 그래서 어긋나는 관계도 생길 터이고.

어쨌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적인 가수 이 적을 좋아한다. 그는 아직 젊으니 더 발전할 궁리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이제 젊지 않아서 제자리걸음도 감지덕지다. ‘늙지만 말고 기도는 내게도 힘을 주는 말이니 작년보다 나은 한 해 만들어보기로 다짐해본다.

 

뒷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픈 게 며칠 째다. 나이가 좀 드니 어떤 증세든 중병으로 느껴진다. 병원에 갔다. 안 하던 공부를 해서 뇌가 충격 받았나 봐요 하며 객쩍은 소리를 하니 의사가 피식 웃는다.

살다보면 참 난감하고 받아들이기 버거운 일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의 본성은 다르게 표출된다. 머리를 굴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동하는 사람, 아닌 척하면서 애면글면하는 사람, 운명이려니 하며 덤덤히 받아들이는 사람, 포기하는 사람, 나는 어떤 쪽일까. 순리에 따르자며 군자연해보지만 고요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러려니'의 경지는 언제쯤 이를 수 있을지.

책을 읽어서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면 책은 읽어서 무얼 하는가.”

탄광사업이 망했을 때 조르바가 지식인 보스(카잔차키스)에게 한 말이다. 생활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책도 읽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아도.

또 다시 계절이 바뀌고 속절없이 세월이 흐른다. 삶도 그렇게 군더더기 없이 조용하면 좋으련만.

 

모 중견 여가수가 남편의 사업 빚 수백억을 대신 갚아줬다는 말을 들었다.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고 아마도 밤무대를 뛰어서일 게다. 가수라면 새로운 곡을 발표하고 홍보해야 할 텐데 옛날 히트곡만 부르는 걸 보니 그 소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애교스런 눈웃음은 나잇살에 묻히고 곱던 음성은 탁하게 갈라진다. 둔중한 몸매의 율동이 안쓰럽다. 같은 노래를 몇 번쯤 부르면 수백억을 벌 수 있을까. 그녀도 이제 중년부인으로서의 여유 있는 삶을 누리고 싶을 텐데. 나이 든 그녀의 반짝이 바지가 슬프다.(울컥)

나는 그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반짝이 바지를 입은 적이 있었던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길 원하지 마라. 사람 열이 있을 때 둘은 날 싫어하고 일곱은 무관심하고 하나는 날 좋아한다.'

누구의 글인지는 모르지만 실체적 인간관계의 민낯이 아닐까 싶다. 내 경우엔 그 하나마저 불분명하지만.(웃음) 오랜 세월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엔 내가 좋다는 사람도 있었고, 까닭 모를 미움도 받아보고 영문 모를 공격도 당해봤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일찍이 몽테뉴도 간파하지 않았던가.

여자는 외모와 심성이 수더분해야 사람이 꼬인다. 까칠한 성격에 마음 온도보다 더 낮아 보이는 표정 온도 때문에 내 곁엔 사람이 머물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다. 철없을 땐 그것이 인복이 없는 탓이라 생각했는데 아마도 ''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 무엇도 이유 없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친구가 필요하면 누군가에게 친구가 돼 주고, 진심을 알아주길 바란다면 상대의 진심도 들여다봐야 하는데.

사람 하나를 만나 기쁨이 하나면 고통과 상처가 둘쯤은 따라다니니, 이런 거 저런 거 귀찮아서 혼자 놀기로 했다. 최소한의 관계를 지향하기로 한 것이다. 블로그에서 누군가 친구신청을 하면 정중히거절한다. 댓글 란도 막아 놓고 이웃 블로그 마실도 다니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 덕이란 걸 베풀 때가 된 것 같기도 한데, 그 덕이란 게 어느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위선과 친할 수 있으니, 세상살이 쉽지 않다.

카잔차키스는 젊은 날,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해 수도원을 순례하고 그리스도와 붓다를 좇아 고행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구원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다'였다. 그의 묘비명에는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자유인이다(중략)'라고 새겨져 있지만 그건 그의 희망사항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처럼 묘비명에 자유인이라고 쓸 수는 없어도 상념에서 벗어나 좀 더 편하고 자유롭고 싶다.

요즘 혼술 혼밥 족이 늘고 있다 한다. 내겐 위안이 되는 현상이다. 슬슬 준비하고 혼영이나 하러 갈까.

 

 

(2019 현대수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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