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금, 그녀의 회색탁자엔..

아데니움 2021. 6. 24. 19:39

<색채로 말한다 특집>

 

지금, 그녀의 회색탁자엔 / 김소현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하늘을 본다.

낮게 드리워진 잿빛구름이 뭔가 쏟아 부을 듯하다. 흐린 날의 서해(바다)를 닮았다. 잔설이 묻은 건너편 산은 나이 든 사람의 머리 모양새 같아 운치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오늘은 몇 명일까. 감염 병 확진 자 수를 확인하며 걱정과 안도를 반복하는 요즘, 그 수에 따라 우울의 채도가 옅어지고 짙어진다. 귀는 음악에, 눈은 텔레비전 여행방송에 가 있는 게 일상이다. 내게도 코로나 블루가 찾아온 건지 때로 답답하고 울적하다. 단세포적으로 이어지는 하루하루가 지겹고, 이러다 치유할 수 없는 멜랑콜리아가 찾아오는 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시간은 무섭게 흐른다.

  회색바람이 부는 요즘 음악과 영화는 평소보다 더 큰 위안이다. 습관처럼 라디오를 켠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사랑의 죽음아리아가 흐른다. 날씨에 어울리는 선곡이라 생각하며 볼륨을 높인다. 아일랜드 공주인 이졸데가 속국인 콘월의 왕비가 되는 과정에서 구혼 심부름꾼 트리스탄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비극에 이르는 내용이다.

왕비는 시집가는 딸에게 사랑의 묘약과 상처를 낫게 하는 약, 그리고 독약을 준다. 콘월로 가는 배 안, 공주는 약혼자를 죽인 트리스탄에게 복수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하녀에게 그와 함께 먹을 독약을 준비하라 하지만, 하녀는 사랑의 묘약을 준다. 잔을 나눠 마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콘월의 왕비가 된 이졸데와 트리스탄은 서로를 잊지 못해 불륜에 빠진다. 트리스탄의 친구이자 왕의 심복인 멜롯은 두 사람을 밀고하고 트리스탄을 찌른다. 어느 외딴 성으로 옮겨진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기다리며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사랑은 목숨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씁쓸하다. 대부분 이별(죽음)을 수반하기에 이미 정해진 길로 달릴 뿐이다.

  회색빛 예술작품은 무수히 많다. 영화 중 대표적인 작품은 <글루미 선데이>. 많은 사람을 강으로 투신하게 한 OST, 레조 세레스의 노래는 멜랑콜리의 극치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4악장(비창)을 들으면 삶의 의미를 잃고 기차역으로 향하던 안나 카레니나가 생각나고, 자클린느의 눈물을 들으면 남편(다니엘 바렌보임)에 배신당하고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뜬 불행한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가 생각난다. 동서고금에 우울하지 않은 예술가가 있었던가. ‘프루스트는 어떤 고통이든 찾아와야 비로소 창작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고, 미켈란젤로는 음울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할 스스로의 운명을 인식했다고 한다.’ 멜랑콜리는 그들에게는 창작의 원천이다.

  세상이 온통 회색이다. 회색(Gray)은 우울한 정서의 색이다. 색채로서의 회색은 슬픔과 상실의 색이면서 한편 지성의 색이기도 하다. 회색 옷을 잘 받쳐 입은 사람에게서는 달뜨지 않은 차분함과 세련된 도회적 미가 느껴진다. 딱히 좋아하는 색은 아니지만 배색으로서의 회색은 좋아한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을 맞춰주는 인품 좋은 친구처럼 어떤 색과도 잘 어울리기에 사랑하기보다는 신뢰하는 색이다. 광택이 들어가면 은은한 화려함으로 파티 복이 될 수도 있으니 참으로 매력적인 색이다. 어느 색 전문가는 무채색이 밝을수록 차갑고 어두울수록 따뜻하게 느껴지는 색이라 했다. 밝음과 어둠,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중용의 색. 그래서인가. 회색 옷을 살 때면 절대 그레이를 고르기 위해 온 감각을 동원한다.

 

  마트에 다녀오는데 빗방울이 듣는다. 회색의 물 막대기가 잿빛 보도로 스민다. 저만치 앞서 걷는 승려의 바랑도 잿빛으로 변한다. 비 오는 날 보는 승복僧服은 더 한층 속세의 욕망과 무관해 보인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상념에 들기엔 빗방울이 굵다. 장바구니를 들고 귀가를 서두르는 걸음에 조급함이 묻는다. 마치 집에 답을 두고 온 사람처럼. 그리고 또 다시 밤,

습관처럼 밤의 정령이 찾아왔다. 사위는 깊은 어둠에 싸이고 별 한두 개가 힘없이 고개를 내민다. 요즘 자장가로 머리맡에 둔 슈베르트의 밤과 꿈을 듣는다. 오늘은 늘 듣던 이안 보스트리지 아닌 김 현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신비로운 보랏빛 세계로 인도하는 듯하다.

 

성스러운 밤이 깊어간다. 달빛이 공간들과 사람의 잔잔한 가슴 사이로 스며들듯이 꿈들도 깊어간다. 꿈들이 밤의 성스러움을 귀 기울여 엿 듣는다.

 

 그러나 나의 꿈은 대부분 회색빛이다. 화장실을 찾는데 모두 고장 나 있거나 주차한 차를 찾아 헤매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꿈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상징과 은유를 통해서 무의식의 진실을 보여준다는데, 융 선생께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자명하다. 나는 잠자는 게 싫고 현실로 돌아오는 아침이 좋다. 현실이라야 무의식의 세상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눈을 떴으니 살아야 하고, 그리고 음악이 있지 않은가.

  행복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라고 누군가 말했다. 사람들은 무지개 같은 그것을 좇아 부지런히 뭔가를 도모한다. 그것은 어쩌면 삶의 핑계이고 의무일 수 있다. 가고 싶은 곳을 못 가고 (자의적) 감금상태인 요즘, 집에서 즐기는 놀이(행복)를 찾아 분주하다. 음악과 영화와 책, ()여행을 하는 그녀의 회색탁자에는 지금, 외롭지만 따스한 멜랑콜리가 있을 뿐이다.

 

 

(현대수필 여름호)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독한 귀차니스트의 일기  (0) 2020.05.31
미라보 다리의 그녀, 마리 로랑생  (0) 2018.06.21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0) 2018.06.19
오르페우스처럼  (0) 2018.01.24
나의 글쓰기는..  (0) 2017.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