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 풍경

조용한 투병

아데니움 2023. 10. 26. 21:03

1차 항암을 마치고 집에 온 지 10일째다.
그는  죽과 간식을 먹으며 묵묵히 견디고 있다.
(이어폰을 끼고 소리는 죽인 채 온종일 티비 화면으로 당구와 기타 스포츠를 보는 멀티 태스킹을 하고 있다.)
나는 그 옛날 죽순이 실력을 되살려 열심히 죽을 끓이고 믹서로 갈아 그에게 먹이고 있는데
그 손놀림은 거의 기계적이다.
반찬은 사골국물과 동치미 국물,
간식은 두유와 요플레, 연시, 바나나, 간 사과와 토마토  정도다.
내과의사는 암환자에게 과일은 쓰레기일 뿐이라며 고기를 먹으라 했다.
그래서 거의 소고기죽과 전복죽을 끓이고 너비아니를 구워 잘게 썰어 먹인다.
단지 삼키지 못할 뿐 의식 멀쩡하고 식욕은 왕성한데 그 공복감이 오죽하랴..ㅠ
다행인 건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짜증을 내지 않는 거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원망의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그런 성정이 암의 공격성을 높이는 건지도..
안방에서는 티비와 음악소리가 번갈아 들리고
주방에선 간헐적으로 믹서기 소리가 들릴 뿐
집은 비오는 사찰 같다.
 
15년 전 처음 암이 발병했을 땐
퇴직 전이었고
밖에서 인간관계를 잘 한 사람답게 병실을 찾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는데
이번엔 가족들 외엔 알리지 않아서인지 그저 조용하다.
예전엔 누군가 암에 걸렸다면 놀라고 충격적이었지만
요즘엔 그렇구나 할 정도로 환자가 많은 듯하다. 무튼..
암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역시 무서운 질환임엔 틀림이 없다.
다음 주 재입원 후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지만
평온하고 고요한 투병풍경이다.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 굴러다니는 약으로 코로나를 견딘 나는
후유증으로 때로 몸이 천근이지만
죽순이 노릇을 착실히 하고 있다.
책임과 의무엔 강한 내가 아니던가.
폭풍전야 같은 나날..
암도 (가을단풍처럼) 고요히 소멸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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