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에는..

류시화 시집

아데니움 2022. 10. 14. 10:42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제목)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눈 곧 꽃 필 것이다

 

그런 사람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슴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삶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 찾아서

지상에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는 사람

마른 입술은

물이 보내는 소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

 

그러하기를

 

당신이 기쁨을 얻는 일이

그 기쁨만큼의 가치가 있기를

당신이 섬이라면

파도들이 앞다퉈 당신을 향해 달려오기를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단순하기를

그만큼 분명하기를

태어나서 처음 운 울음만큼

당신의 운명이 절실한 것이기를

당신에게 작용하는 관성의 법칙이 허무가 아니라

행복에 대한 것이기를

당신이 엎드려 우는 곳이 동굴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 위이기를

당신에게 삶이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백지가 아니기를

그 백지 뒤집으면 지도가 나타나기를

당신 삶의 굴곡이 빛나는 굴곡이기를

자신의 감정들을 다양한 색깔의 날씨처럼 여기기를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랑의 종착역은 당신 자신이기를

그곳에서 다시 기차가 출발하기를

삶을 그리움으로 물들이는 것이 많기를

하루 한 번은 회전하는 세계의 중심이 되어

한 송이 꽃처럼 고요히 앉아 있기를

당신의 마지막 말은 '고마워요 다시 만나요'이기를

그러하기를

 

 

*제주도에서 (시인에게서) 사인 받아온 시집을 이제야 읽었다.

시인의 시를 다 본 건 아니지만

세월이 묻어서인가. 시들이 좀 더 따뜻해진 것 같다.

문학적 어휘를 떠나 삶에 대해, 사람 사물에 대해

간절한 애정 같은 게 느껴져 좋았다.

 

 

 

 

'그 책에는..' 카테고리의 다른 글

ㅡ마르케스 유고소설 {8월에 만나요}  (2) 2024.03.24
《나에겐 가까운 바다가 있다》  (2) 2023.08.13
작 별 인 사 /김영하  (0) 2022.09.04
인도 우화집  (0) 2022.02.03
예술의 주름들  (0) 2021.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