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청빙의 가르침 / 조정권

아데니움 2019. 2. 13. 14:30


청빙의 가르침


'청빙'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김달진 옹이 번역하신 '한산시'를 읽어 가다 보면 시 하단에 붙인 주석 속에 두 줄 정도 설명이 나와 있지요.

'청빙'에는 추운 겨울밤 여우 한 마리가 언 강바닥을 두드려 가며 얼음 소리를 들어 보고 조심스레 강을 건너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의미 범위를 따라가 보면 지금 먼 곳에서 앞에 나타난 눈 덮인 광대한 강을 코앞에 두고 있는 존재인 우리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어요. 눈 덮인 강은 추위로 위독하고 고독한 곳이지요. 건너려 하는 자는 여우의 앞발을 빌려 강바닥이 잘 얼어 있는가 두드려 보아야 합니다. 겉이 얼어 있다 해서 속까지 다 얼어 있는 것은 아닌 것.

단단하게 얼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강바닥에 귀를 쫑긋이 붙이고 납작 엎드린 채 회색 코털을 바짝 대고 한 발씩 앞으로 딛는 여유가 두드리는 맑은 얼음소리, 깨워내는 소리, 불러내는 소리, 자기 손으로 두드려 보고 듣는 얼음 소리, 시란 이렇게 두드려 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쓰는 시는 대답 없는 상태에 대한 질문입니다. 대답 없는  상태에 대한 두드림이지요. 언 강은 대답이 없는 상태지만 그 강을 두드려 보아야만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길이 나옵니다. 부정해야만 하는 길도 나옵니다. 그 길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 쯤에 와 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두드려 보아야만, 갈 방향이 한 발치 쯤 코앞에 보일 뿐입니다. 내가 어디로 걸어왔는지는 뒤를 돌아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조차 얼음이 무너져 녹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 해 동안, 정말 오랜 몇 해 동안, 나의 시는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휩싸이는 순간 가지 않는 것도 고통이요, 더 가는 것도 고통이었지요. 두려움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더 무서웠습니다. 시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에게 다시 말 걸기가 무서워져 갑니다. 말은 내게 긍정이면서 부정이요, 질서이면서 가득한 혼돈이었습니다. 이 세계도 그러했습니다. 혼돈 속에서 긍정을 만들어 가는 자발적 질서가 있는가 하면, 질서 속에서 질서를 부정하는 자발적 혼돈도 있었습니다. 시는 이렇게 내 안의 소용돌이였습니다. 말 속에서도 혼돈과 질서는 서로를 거부하고 있으며, 혼돈이면서 질서인 말은 서로가 통합적인 일부일 뿐입니다. 여전히 질문을 죽이는 응답이 말이고, 응답을 죽이는 질문이 말입니다. 이 상호작용의 융합은 생성되는 무로 인해 상호 혼돈에 빠지고, 혼돈은 그 안에서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질서 의지 때문에 또 혼돈에 빠집니다. 질서를 지향하는 말이 혼돈을 지향하는 말과 함께 태어납니다. 마치 쌍두아와 같이.

 시의 장소는 말의 질서가 봉인된 곳입니다. 그 곳은 말의 혼돈이 같이 묻힌 곳이며 새롭게 질서가 얼음 소리처럼 들려오는 출발점입니다. 시는 청빙을 출발점으로 삼는 시인들의 의지입니다.



                                               조정권 시인 산문 유고집 '청빙'중에서


* 비단 시 뿐이랴

 모든 글쓰기가 그럴 것이다.

책을 사다 보면 후회되는 책도 있고

잘 샀다는 생각이 드는 책도 있는데

이 책은 참 잘 샀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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