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시 두 편

아데니움 2018. 10. 19. 13:24


커피가는 시간 / 문정희


아직도 쓸데없는 것만 사랑하고 있어요

가령 노래라든가 그리움 같은 것

상처와 빗방울을 그리고 가을을 사랑하고 있어요

어머니

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요

밥보다 시커먼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몇 권의 책을 끼고 잠들며

직업보다 떠돌기를 좋아하고 있어요

바람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홀로 가는 별과 사막을

미친 폭풍우를 사랑하고 있어요

전쟁터나 하수구에 돈이 있다는 것쯤 알긴 알지만

그래서 친구 중엔 도회로 떠나

하수구에 손을 넣고 허우적대기도 하지만

단 한 구절의 성경도

단 한 소절의 반야심경도 못 외는 사람들이

성자처럼 흰옷을 입고 땅파며 살고 있는

고향 같은 나라를 그리며

오늘도 마른 흙을 갈고 있어요

어머니



커피를 내리며 / 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

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굴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

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

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

하늘의 높이를 재려 한 얄팍한 깊이로

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

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

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

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의 온도 차이로 성애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

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

눈물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

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

걸러내어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서

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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