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마음사전 / 김소연

아데니움 2018. 9. 18. 20:01



진실


진실을 알기 위하여 사람들은 무덤을 판다.

진실을 캐기 위한 삽질이 결국은 제 무덤을 파는 것으로 이어진다.

진실은 언제나 너절하다. 그리고 궁색하다.

그것을 알고자, 혹은 알리고자 하는 순간부터 독이 번진다.

천천히 독이 번져나가는 동안 열심히 진실을 추구한다.

진실은 언제나 알고 나면 허망하고 허탈하다.

그것이 추한 것이면 넌더리가 나는 허탈감에 빠진다.

마치 아귀처럼 먹어대고 난 다음의 기분 나쁜 포만감처럼.

그렇지만, 그것이 아름답고 지극한 것일 때는 또 다른 형태의 허무가 있다.

공복의 쓰라림을 다 견디고 났을 때의 느낌처럼,

그렇지만 포만감도 공복의 맑은 정신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이해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사랑과 신앙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큰 두 거짓말.

사랑이라는 단어와 신앙이라는 단어는 묵음으로 발음되어야 옳다.

허사虛辭로 통용되어야 맞다.

기의를 완전하고도 정밀하게 소외시키고 있는 이 기표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전혀 일관 없음.

사랑이라는 해묵은 단어는, 일찍이 그리스도 이후, 이천 년 전에 유명무실해졌다.

신앙이라는 오래도록 포르말린에 절여놓은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폭풍속 나무들의 헤드뱅잉을 보듯,

바람을 막아주는 창문을 닫아놓은 채 사람들은 창밖을 음미하듯,

구경할 수 있는 거리가 확보되었을 때에만,

그리고 바람막이 같은 유리벽이 존재할 때에만

사랑과 신앙이 아름답다는 설파가 통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사람들은 간격을 두고 벽을 쌓고,

참호속에서 눈만 내밀고서 사랑과 신앙을 품어 안으려고 한다.



'배두인들에게는 낙타를 지칭하는 낱말이 천 가지도 넘는다고 한다.

이누이트들에게는 '눈'의 종류를 구별하는 어휘가 수십가지는 된다고 한다.

스콜이 매일매일 퍼붓던, 적도 근처의 어느 뜨겁던 나라엔

'소나기'를 뜻하는 낱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내 앞에 낙타 한 마리가 도착해 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길고 긴 속눈썹으로 쓸어내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나의 낙타에게, 나는 "낙타야" 하고 불러야만 하나.

이 녀석을 호명할 알맞은 말 한 마디가 없어서,

나 또한 녀석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중이다.


마음의 ,무수히 중첩되고 해체되고 얽혀드는 실핏줄.

나는 언제나 핏발이 선 채 피곤해하지만,

두 눈 똑바로 뜨고 정면 응시하면서, 바라보려 한다. 세상을, 사람을, 당신을.

마음은 우리를 현실 이상의 깊은 현실과 만나게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시선이기에./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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