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고요한 달밤

아데니움 2018. 8. 4. 10:19



고요한 달밤


                                                해안화상


고요한 달밤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들고 오는 이가 있거든

굳이 줄을 골라 곡조를 듣지 않아도 좋다


이른 새벽 홀로 앉아 향을 사르고

산창에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굳이 불경을 펼치지 않아도 좋다


저문 봄날 지는 꽃잎을 보고

귀촉도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라면

굳이 시인이 아니어도 좋다


이른 아침 세숫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초 잎을 손질할 줄 아는 이라면

굳이 화가가 아니어도 좋다


구름을 찾아 가다가 바랑을 베고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굳이 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좋다


해 저문 산자락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서 온 누구인지 물을 것 없이

굳이 오고가는 세상일을 들추지 않아도 좋다





*해안 봉수(1901-1974): 전북 부안 내소사 서래선림에서 오랫동안 주석하며 선풍을 진작했다.

*법정스님 /「간다, 봐라」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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