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다른 길 / 황현산

아데니움 2018. 11. 10. 15:06



  국립국어원의 온라인 소식지 <쉼표 마침표>에는 '소리가 예쁜 우리말이 연재된다.

주로 '송알송알' '방글방글' '자밤자밤' 같은 첩어들이 소개된다. 같거나 비슷한 어절이 반복되니 당연히 박자가 좋고, 또 많은 경우 토속 정서와 연결돼 있어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에서나 몸이 벌써 그 실감을 따른다. 게다가 대부분 의성어나 의태어이다보니 말 하나하나가 그 자체에 비디오나 오디오를 단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말을 입에 올리면 입담이 좋다는 말을 듣고, 글에 올리면 글에 생기를 주고 흥을 돋운다. 그러나 자주 쓰면 글이 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는데, 이유가 있다.

  글에 의성어나 의태어를 많이 쓰게 되면 글 쓴 사람의 사고가 너무 단순하거나 게으른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수 있다. 이런 말들은 글에 현실감을 주는 둣하면서도 실제로는 구체성을 없애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숲에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고 말할 때 '살랑살랑'은 바람의 세기와 성질을 어느 정도 전달하지만 그 바람을 개별화해주지는 않는다. '살랑살랑'을 쓸 수 있는 바람은 많지만 글 쓴 사람이 표현하려고 하는 바람, 그 시간 그 숲에 불었던 바람은 유일한 바람이다. 똑같은 바람이 두 번 다시 불지는 않는다.

  이렇게 말하니 모파상이 전하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플로베르는 제자 모파상에게 "온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두 알의 모래나, 두 마리 파리나, 두 개의 손이나, 두 개의 코가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나서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단 몇 줄의 문장으로 뚜렷이 개별화하고 다른 모든 인물이나 사물과 구별될 수 있도록 표현하라"고 했다.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 똑같은 것이 없다고 해서 꼭 그것을 구별해서 표현해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글을 통해 당신의 존재와 생각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싶다면 조금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모든 것이 수많은 '살랑살랑' 속에 묻혀버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역사에서 '일물일어설'은 미학적 방법으로서의 가치 못지않게 사회적 의의도 지니고 있다. 그 의의를 '식민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

 근대 세계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식민화하기 전에 문명이 자연을, 이론이 삶과 경험을 식민화한다. 근대화와 맞물린 이 식민화는 자연과 사회와 인간의 신체를 단순화하고 표준화해 편의에 따라 재단하고 배열한다. 자연과 인간의 삶은 납작해진다.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려는 '일물일어설'의 욕구는 그래서 평면에 깔린 자연과 삶을 본디 모습 그대로 복구하려는 기획과 이어진다. 정확하고 적절한 묘사는 마치 쭈그러든 축구공에 불어넣는 바람과 같아서 땅에 붙은 삶에 다시 그 입체감을 회복해주고, 존재와 사물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준다.

  상투적인 글쓰기는 소박한 미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식민 세력에 동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삶에 내장된 힘을 새롭게 인식하려 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남이 가지 않는 다른 길을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다른 길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당신이 저 상투적인 '살랑살랑' 대신 다른 말을 써 넣는다면 당신은 벌써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벌써 예술가다.


                                                                                   (2015.5.12 황현산 산문집 '사소한 부탁'중에서)

   


*

나도 쭈그러든 축구공에 바람을 불어넣듯, 그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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