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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읽기 /허정열

앞선 사람의 등을 본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등이 산의 등줄기처럼 굽어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삶의 무늬가 느릿느릿 출렁인다. 한번도 소리 내어 목소리를 들려준 적 없는 등이 뒤뜽이며 말을 걸어온다. 수시로 흔들렸을 바람의 시간과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먹구름의 무게가 느껴진다. 고독과 외로움이 깃든 쓸쓸함이 덮여 있다. 정면으로 마주칠 때는 볼 수 없었던 사연들이 무딘 봉분처럼 숨어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층층이 쌓여 오래된 서가를 보는 듯하다. 등은 내가 써서 남에게 무료로 배부하는 한 권의 자서전이다. 길을 나서면 한 사람의 생을 유추하며 읽을 기회가 주어진다. 잠시라도 멈춰서 읽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건 기다림이 있는 정류소나 대기실이다. 그것도 잠시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 ..

줄들의 향연

복부를 열고 식도 절제 수술을 받은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하루를 지낸 뒤 집중치료실로 옮겨졌다. 산소호흡기와 이런저런,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줄을 여럿 매달고.. 그러나 시일이 지나며 상태가 좋아질수록 그 줄은 하나씩 제거된다. 그리고 다시 일반 병실로.. 수술 5일째, 줄들의 향연은 끝나고 이제는 유동식이 들어가는 줄과 약물주사 줄, 노폐물 배출 줄 세 개 정도만 매달려 있다. 흉부외과 수술은 많이 걸어야(운동) 회복이 빠르다 한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걷고 있다. 병원 복도를. 사후에 강한 타입.. '의료 대란' 직전에 수술을 끝내 참 다행이다. 그동안 응원과 기도를 해주신 주변 지인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세수하고 거울을 보는데 낯선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그새 십년 쯤 늙은 듯..ㅠ 아침에 눈을 뜨고..

삶, 그 풍경 2024.02.24

요즘엔..

얼치기 간병인 노릇을 한 지 3개월째다. 요즘 나의 생활 루틴은 가히 AI적이다. 환자의 끼니를 위해 하루 세 번 정확히 시간을 지켜 밥상을 차린다. 아니 죽상을.. 8시, 12시, 저녁 6시.. 하루 세 번 죽을 끓이면서 나의 자아는 죽을 쑤었다. 하지만 사람 하나 살리는 데 일조한다면 까짓 자아쯤이야.. 그러는 동안 그림자처럼 라디오가(음악이)나의 동선을 쫓는다. 안방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안방으로.. 늘 그랬듯 라디오가 나의 버팀목이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정리를 마치면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다. 고요한 밤의 적막을 즐기며 혼자 놀다가(티비도 보고 인스타도 보고 책도 보고..) 얼추 1시쯤 불을 끈다. 한 주에 한 번 마트에 가는데 유일한 외출이어선지 먹거리를 고르는 손길이 느긋하다. 하지만 카트 가..

삶, 그 풍경 2024.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