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더러움 (331쪽)
국회에서 여야 간에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물타기'로 쟁점을 뭉개버리면
여당도 야당도 손해 보지 않는다. 물타기는 쌍방이 죽기 살기로 물어뜯다가, 슬그머니 함께
물러서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나의 물과 너의 물을 섞음으로써 오염도가 평군화된 물을 공유한다.
너의 오염이 나의 오염을 희석시키는 생수가 되고, 나의 과오는 너의 과오를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물타기는 문제를 규명해서 해결되지 않고, 쟁점을 일단 물 대 물의 대결로 바꾸어 놓고
물과 물을 섞음으로써 대결구도를 지워버린다. 문제는 여전히 현실 속에 남아 있지만, 물타기는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까지도 뭉갠다.
물타기는 오염된 이 물과 저 물을 섞어서 더 큰 오염수를 만드는데,
이 오염수의 바다에서는 현실의 판단준거가 몽롱해져서 사람들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청정과 오염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오염은 생활화된다.
.........................중략................
물타기는 사실의 힘이나 법리가 아니라 말에 의해 수행된다.
'너의 물은 냄새난다'라고 서로 고함을 질러서 몰아붙이면
죄 있는 자들끼리 돌로 치는 것 같은 형국이 되지만,
아무도 돌에 맞지는 않는다. 죄가 있거나 없거나 돌에 맞을 수 있고,
죄가 있거나 없거나 돌을 던질 수 있고, 죄도 돌도 어디로 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다들 돌을 던지는 시늉만 하고 던지지 않는다.
말들은 허공에서 부딪쳐서 먼지로 부스러지고 시늉으로 시늉을,
물타기로 물타기를, 거짓을 거짓으로 막아내면 물은 잘 섞어진 것이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물이 다 섞이고 나면,세상의 오염수는 더 늘어나 있고, 세상의 어두움과 인간의 몽매는 더욱 깊어진다.
....................................
'정치공세'를 할 때는 흔히 '국민'의 이름을 부르면서 국민의 뜻, 국민의 저항, 국민의 분노,
국민의 소망이 이 공세의 편이라고 하고, 그 상대편도 똑같은 고함을 지른다.
이때 '국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민'이라는 이 거대한 군집은 살아 있는 실존이 아니고, 일종의 추상명사이다.
'국민'은 아무도 아니다. 이 허깨비가 상여 행렬의 요령잡이처럼 정치공세의 맨 앞에
끌려와서 '국민,국민'하면서 요령을 흔든다.
결국 물타기는 말의 전쟁인데, 부딪치던 말들끼리 한데 들러붙어서,
말은 현실의 문제들을 깔아뭉갠다.
말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권력의 자리에 오른다.
오염수의 총량은 늘어나고 오염도는 높아진다.
오늘의 구정물이 내일의 구정물에 합류되고,
이 구정물의 강가에 말들의 쓰레기는 산처럼 쌓여서 썩어가고 있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시대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
소설보다 산문에서 더욱 빛나는 그의 필력,
그저 혀를 내두르며 읽을 수밖에..ㅎ
연필로 쓴 만큼 소박한 표지,
유머와 통찰과 애국심과 문장력과 자연을 사랑하는 따듯한 마음..
기타등등이 전해지는 467쪽 책이다.
나이 70, 연필로 꾹꾹 눌러쓰는 모습이 생각돼서인지
애틋하고 짠하다.
'타인의 글(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정권 詩 (0) | 2020.08.24 |
---|---|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조정권 시인) (0) | 2020.07.28 |
10주기에 읽는 추모시 두 편 (0) | 2019.05.22 |
김훈 작가의 말 (0) | 2019.04.02 |
청빙의 가르침 / 조정권 (0) | 2019.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