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몸들
1.
뉴욕 소호에서 음주사한 화가 정찬승이
그림한테 이혼당하고,
귀국전을 연 전시장을 다녀왔다
그림은 한 점 보이지 않고
전시장 한가운데에
카페가 옮겨와 있다.
홍대에서 뜯어온 벽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생가에서 싣고 온 툇마루도 생생히 살아 있고
오그라진 화실 소파도 살아 있는
의자에 앉아 신문도 보고 낮잠도 자며
술 마시고 있다
이게 신성한 전시장인가 어리둥절해하는
하객과 시민들과 잡담하며 술 마시며,
그림 한 점 걸지 않은 전시장에
세상 술 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인간 한 점.
미리 보여준 삶의 폐업전.
.......
4.
아, 해외로 떠돌다가, 떠돌다가, 돌다가,
국내로 망명한 생들!
국내망명자들.
5.
발레리의 40년 고독 앞에
팔팔할 때 한번, 고개 숙여봤으면 됐다.
더이상 난 안 숙이련다.
대신, 문안차 홀아비 정병관 선생한테는
그 무덤 앞에 한번 머리를.
빠리 제8대학 도서관 사서
마른 빵과 커피로만 기숙하며
미술사 박사학위 딴 노인 학생,
누보 레알리슴의 화가들
극사실의 현실을 냉정하게 그린
리베라씨옹패들!
정년 5년 앞둔 연세로 이화여대에 모셔와 죽인,
한번도 술과 장미의 나날을 들어볼 시간을 안 준 세상,
한번 찾아가 뵀어야 했는데,
벽제에나 가야
계실까.
이 마음의 걸(乞)
서울 미대 교수 옷
길가에 벗어 잘 개어놓고
혜화동 골목 귀퉁이에
쭈그리며 취해 있던 장욱진 선생이
걸치고 있는 초겨울 햇빛.
그 햇빛 결이 나 사는 곳.
어제는 잎 다 떨구고 있는 저녁비
혼자 가게 했다.
거적뙈기 밑에 꺼져 있는 햇빛.
거 누구요,
거 뉘시요.
땅거미가 먼저 나와 있다.
이 마음의 걸(乞).
거적뙈기가 몸뚱어리로 보인다.
한눈파는 사이 세상엔 눈이 내렸다.
얼음밤세상으로 변해 있다.
이 마음의 걸.
이 맘에 방금 받은 겨울 산문집,
그 속에 들어 있는
김지하 선생의 손을 쥐고 싶다.
먼저 걸어간 마음의 걸,
걸(乞), 그러나 뜨거운,
뜨거운, 행(行).
눈이 또 온다.
흰 눈 시체들 나를 밟고 지나간다.
더 밟아다오.
더 나를 밟아다오.
조정권의 시세계에 등장하는 인간 삶은 대체로 스산하고 음울하다.
'인생은 허무와의 비행기록'이며 '반복되는 연소불량의 하루들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비극적인 몸짓이나 목소리를 표나게 부각하거나
강조하는 진폭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의 곡선은 지나칠 정도로 단조롭고 평이하다.고
홍용희 문학평론가는 썼다.
'삶의 진정한 수척함은 '걸'乞속에 내포된 강골과
청빙으로 뻗어가야 하나
내 언어들은 거기 닿기는커녕 멀리 떠돌기만 했다.
시집을 준비하던 연초 내내 거적뙈기 밑에 꺼져 있는
햇빛 같은 것을 들추고 있는 심정이었다./시인의 말 중에서.
어쨌건..
시인만이 알 수 있는 모호한 시어를 구사하기보다는
산문처럼 편하게, (마침표도 찍어가며) 쓴 시들이 정감간다.
당대 활동하던 문인, 예술가들 이야기가 정겹고도 슬프고..
음악 미술 분야에 일가견이 있었던 조정권 시인의 감수성이 좋다.(2017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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