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너는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잘 모른다.
내가 강을 바라볼 때 너는 산 쪽을 쳐다봤고 내가 붉은 노을에 영혼을 물들일 때 너는 여명의 푸른빛을 찬미했지. 내가 도심의 다운타운 불빛에서 생기를 얻을 때 너는 고적한 들녘에서 보리피리를 불었던가. 내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릴 때 너는 동네 주막 구석자리에서 차가운 막걸리 사발을 움켜쥐었을 거야.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치레에 신경 쓸 때 너는 오직 단벌옷만을 보여주었지. 새 구두를 곱게 모셔두고 낡은 구두를 고집스레 신고 다녔어. 그 모습은 신선하고 기묘한 매력으로 다가왔고 너의 그런 엉뚱함(?)에 나는 차차 눈이 멀었던가. 순수의 시절이었다. 내가 저 먼 포르투갈 선술집을 그리며 단조의 멜랑콜리에 빠져 있을 때 너는 무심한 듯 장조의 음을 씩씩하게 흥얼거렸고, 내가 FM에 주파수를 맞출 때 너는 AM을 고집했지. 내가 나태의 등에 업혀 뭉그적거릴 때 너는 근면을 본능처럼 달고 다녔고…, 동상이몽의 탑은 점점 높아지고 시선은 늘 어긋났지. 엇박자로 젓는 노에 배는 제자리를 맴돌았고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 사념은 삐거덕거렸어. 두 ‘열차’는 좁혀지지 않는 평행의 레일 위를 완고한 에고이스트처럼 마구 달렸지. 선로의 교차점에서 잠시, 아주 잠시 만날 때가 있지만 그것은 늘 찰나였다.
사람은 제각각 다르다. 얼굴도 목소리도 옷차림도 성격도 취향도 가치관도…. 지하철을 타보면 그 많은 사람들의 신발이 다 다르더라. 디자인도 색깔도. 참 신기했어. 신의 장난인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감정을 부대끼며 관계를 유지하곤 해. 다르다는 건 틀린 게 아닌데 때로 갈등을 잉태하고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틀림엔 관대해도 다름은 용납하지 않는 거야.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갈등은 사라진다. 편안하고 무난한 관계를 위해 굳이 누군가가 변해야 한다면 그건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란 걸 깨닫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알다시피 심신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건 시간이야. ‘세월 이길 장사 없다’는 말은 평범하고 진부하지만 진리였어. 올곧은 평행선도 가차 없는 세월의 힘에 누그러져 휘청거린다.
누군가 말했다. 시간이란 사건과 같다고, 나이 든 사람에게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건 새로운 사건이 없어서라고. 남은 세월, 새로울 게 무에 있을까. 뒷걸음질 치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에 두려움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런데 시간보다 더 무서운 게 있더라. 바로 연민이야. 사랑보다 더 지독하다고들 하지.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남은 생, 작가로서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연민하겠다고.
2015 분당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