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험한 길
김소현
폴 메카트니가 한국에?
그의 내한공연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환호를 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보러 가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 한 편에선 언젠가처럼 찜찜한 느낌이 다시 스멀거렸다. 왜 세계적인 스타들은 나이가 든 후에야 한국에 오는 걸까. 경제력 성장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후진국이란 걸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곤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늙은’ 메카트니를 볼 것인가 여행을 갈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나는 그를 버렸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일본공연도 취소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록그룹 비틀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 고상한 음악에 절어 있던 영국의 점잖은 신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왔을 때 한국 가요계가 술렁인 것처럼. 그 신선한 충격은 그들의 주 무대인 리버풀을 넘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의 음악적 취향은 범상한 편이어서 색깔이 진하지 않고 편안한 비틀즈 노래를 좋아했다. 질척이지 않고 유쾌한 감성의 노래들은 맑고 푸른 하늘에 떠있는 풍선이나 시냇물 소리, 부드러운 봄바람과 연초록의 잎사귀가 연상되고, 캐주얼한 옷차림과 너른 잔디의 대학 캠퍼스가 생각난다. 이른 저녁 다운타운의 생기처럼 명랑하고 술에 비유하자면 산뜻함과 담백함이 맥주 같다고나 할까.
비틀즈의 노래는 자유로움이다. 경쾌하면서 발랄한 노래들은 보수적 타성에 젖은 사람들의 억눌린 감성을 치유해 주었다. 음악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들의 노래에 ‘주옥같은’이란 수식어는 식상하다. 노래 중, <상실의 시대>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원제 ‘노르웨이의 숲’이 있다. 조금은 우울하고 몽상적인 소설 내용을 함축시켜 만든 곡은 소설과는 달리 가뿐하다. 이 노래가 당시 하루키의 인기를 대변해준 듯하다.
비틀즈 멤버 중에서도 보컬과 작곡을 맡았던 폴 메카트니의 노래는 한국의 발라드 노래와 비슷하다. 검은 장발에 구레나룻 수염, 짙게 쌍커풀 진 커다란 두 눈. 그는 그 얼굴을 닮은 둥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참 많은 사랑 노래를 불렀다. 비염환자 같이 약간은 눌리는 듯한 소리로 심상하게 부르는 노래가 친근한 매력을 준다. 특별히 미성도 아니요 뛰어난 가창력이 아님에도 듣는 이의 감성을 울리는 것은 멜로디의 힘일 것이다.
모 나지 않은 얼굴처럼 따뜻한 심성을 가진 그는 멤버 존 레넌이 조강지처인 신시아를 버리고 오노 요코와 사랑에 빠지자, 신시아 모자母子에게 친구 이상의 보호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고 그 빈 자리가 상처로 남아 있던 터라 존 레넌의 아들 줄리안 레넌이 아버지 없이 불우하게 자라는 게 가여워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HEY JUDE’는 줄리안 레넌에게 힘내라고 만들어준 곡이다. 그런 그 역시 세 번째 부인과 살고 있으니 결혼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려운 일인 듯하다.
사람들은 외로워서 모이고, 모이면 갈등하고 불화한다.
음악하는 사람들이라고 다르겠는가. 균열이 생기면 부서지기 마련이다. 왕성한 활동으로 최고의 인기와 부와 영예를 나눠 가졌지만, 음악적 견해와 가치관 차이로 레넌과 메카트니가 결별한 뒤 비틀즈의 인기도 추락한다. 소문이란 건 부풀려지기 마련이어서 두 사람의 갈등은 곁에서 지켜보지 않은 이상 단언할 수는 없다. 광팬의 총에 맞아 레넌이 세상을 떠나고 조지 해리슨도 암으로 죽은 후, 메카트니는 싱글로 활동하며 틈틈이 그림 그리는 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다.
이제 그의 나이도 칠순이 넘었다. 윤기 있던 검은 장발은 퇴색하고 목소리는 탁해졌다. 그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가장 ‘발라드’적인 노래, THE LONG AND WINDING ROAD는 오래 전 발표된 노래지만 음악인생을 결산하는 듯한,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에게 들려주는 내밀한 메시지 같기도 하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래, 멀고도 험한 게 인생길이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던가.
멀고 험한 길, 그 끝에 그대에게로 이르는 문이 있네,
난 당신이 상상도 못할 엉뚱한 길에서 여러 번 헤매었었지,
하지만 그때마다 난 다시,
멀고 험한 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돌아왔다네,
풍문에 의하면 그는 일본에서 극비리에 출국했다고 한다. 이제 한국에서 그를 볼 기회는 희박해졌다. 요즘 한류 열풍 때문인지 세계의 젊은 뮤지션들이 우리나라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참 다행한 일이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던 유명스타들이 주름지고 늘어진 얼굴이 되어서야 생색내듯 내한하는 일은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The Beatles-The Long and Winding Road (1970)
(현대수필 가을호 문화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