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
김 소현
사십대 어느 땐가 같이 운동하는 여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누군가 모씨에게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하자 어느 삼십대가 쏘듯이 말했다.
“그래봤자 사십대죠.”
그 말을 들은 사십대들은 모두 기가 죽는 듯했다. 요즘 유행어로 ‘헐’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뛰어난 미모를 가졌어도 젊음을 이길 순 없다는 뜻일 테다. 나이 어린 여자는 애송이로만 생각했던 내게도 그 말은 충격이었다. 언젠가 가수 한영애도 나이 든 가수의 콘서트에는 관객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자조적으로 한 적이 있다. 여자에게 나이듦은 죄악인가.
여자의 피부노화는 이미 이십대 중반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그런 기준이라면 외적인 미는 마흔이, 아니 서른이 지나면 의미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피부과에서 말하는 미인의 기준일 뿐이다.
한때 미인선발대회에서 바비인형 같은 미녀들이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외모도 중요하지만 내면의 미도 갖추겠다고…, 여자의 미는 외모라고 생각하던 젊은 때였기에 그 말은 점수를 따기 위한 상투적인 말이라 생각했었다. ‘예쁜 것이 착한 것’이란 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도 그 ‘내면의 미’가 받쳐주지 않으면 예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은 세월이 좀 흐른 뒤였다.
내 주변에는 나이 든 ‘미인’들이 많다. 성형외과에서 말하는 팔등신, 황금비율을 가진 미인이라기보다 사람 자체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을 말함이다. 수수한 외모에 늘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은 마치 강호 무림의 내공 깊은 고수들 같다. 실력과 지혜가 풍부하고 처신을 올바르게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긴다.
오랜 세월 한결같은 모습으로, 윗사람은 최선을 다해 보필하고 후배들에겐 배려를 아끼지 않는 신망이 두터운 인생 선배들을 보면 고개가 숙여지곤 한다. 마치 기품 있는 난蘭 같기도 하고 죽竹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며 최선의 삶을 사는 여인, 함께 한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그런 여인이야말로 진정한 미인이 아닌가 한다.
해마다 봄이 되면 산과 들에 꽃이 핀다. 잎도 없고 향기도 없이 요란하게 꽃만 피우는 봄꽃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민 경박한 여자들을 보는 듯해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그것들은 잠깐 피었다 서둘러 사라지곤 한다. 사람도 누군가에게 꽃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조화 같은 봄꽃은 되고 싶지 않다. 사람이 사람에게 좋은 향기를 내뿜는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행복하고 황홀하다.
어린 나무에서는 진한 향이 나지 않는다. 더할 수 없이 만개해 지는 목련의 아름다움이 그 봉오리 보다야 못할지라도 그것을 한물 간 여배우에 비유하는 건 슬픈 일이다. 이젠 누군가의 눈을 즐겁게 하는 미인은 될 수 없겠지만 제대로 숙성된 와인 같은, 깊은 인간의 향을 풍기는 그런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다. 이별 후엔 그 잔향마저 향긋한….
영화 <라붐>에서 어린 소피 마르소의 할머니는 뛰어난 패션 감각과 함께 악기를 배우며 젊게 산다. 남자친구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손녀에겐 친구가 되어주고, 딸의 부부문제에도 현명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에서 주름은 의미가 없었다.
향기를 풍기는 미인으로 늙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나의 노년은 핸드백 속에 향수와 예의를 가지런히 집어넣고, 독선과 아집을 넣는 대신 이해와 배려를 채워 넣어 그것을 아낌없이 꺼내 쓰고 싶다. 좀 부족해 보이는 젊은이들에겐 질타와 책망을 하기보다는 용기와 격려를 나눠주어 꽃 같은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게 하고 싶다. 악기 하나쯤은 제대로 연주할 수 있게 노력할 것이며, 겉과 속의 품위를 지켜 젊은 여인들에게 나이로 인한 굴욕을 느끼지도 않게 할 것이다.
그때 모임에서의 그 당돌했던 삼십대도 지금은 사십대가 돼있을 터이니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지. 어쩌면 비슷한 모임에서 옆자리의 삼십대에게 같은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인’이 되는 길은 멀고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