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의 몰락
김소현
맙소사! 조심한다고 했는데 음식물이 떨어진다. 여자는 혀를 차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침대패드를 걷어낸다. 이런 한심한 행동을 하는 자신을 탓하면서도 한 번 들인 버릇을 쉬 고칠 생각을 안 한다. 차분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행동은 대부분 생각을 앞지른다. 식탁에서 혼자 밥 먹는 게 청승맞게 느껴질 때, 누군가를 동석시키고 싶을 때 여자는 종종 음식을 쟁반에 담아 침대로 가져와 TV와 마주한다. 그런 여자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우아하게 잠을 깨어 하녀가 가져다주는 아침을 맞는 마님의 자태는 아니다.
그 옛날 전세살이 할 때는 방이 좁아 들일 엄두도 못 내다가 이 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하고 이사 올 때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침대였다. 새 살림을 장만하고 새 집에 들어올 때 여자는 신혼으로 돌아간 듯 단꿈을 꿨었다. 집 구석구석을 취향에 맞게 꾸미며 자신의 공간이라 생각한 안방에 좀 더 신경을 썼다. ‘퀸’을 맞아들이며 그에 걸맞은 고급스런 침대보와 이불을 사고 자신이 여왕이 된 듯 폼을 잡았었다.
‘민낯‘의 침대는 나이 든 여인의 그것처럼 민망하기 그지없다.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 세탁기를 돌리며 여자는 베란다 밖을 바라본다. 꽃잎을 떨구어낸 나무에 돋은 아기 속살 같은 연초록 잎이 눈부시다.
‘침대, 너도 한때는 저토록 찬란한 나날이 있었겠지. 일찍이 보루네오 섬 어느 깊은 숲에서 해풍에 단련되고 태양의 열기를 받으며 거목으로 성장했을 너. 멀고 먼 이국땅으로 팔려와 뼈를 깎는 고통으로 산산이 부서져 생각지도 않게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된 건 너의 의지는 아니었겠지. 너를 데려온 후 여왕처럼 떠받들며 계절에 따라, 기분에 따라 옷을 갈아입혔다. 때론 핑크와 화이트로 화사함을 살리고 때론 파랑과 초록으로 바다와 숲을 대신 했지. 가을이 깊으면 네 몸은 자줏빛으로 물들곤 했어. 한때 문학적 뮤즈를 초대해 보겠다고 커버와 이불, 베개까지 보라색으로 휘감는 ‘짓’을 한 적도 있었지. 그럴 때면 ‘하늘을 나는 양탄자’처럼 잠자는 사이 침대에 누운 채로 우주를 떠다니는 환상을 꿈꾸기도 했을 거야. 하지만 도도하기로는 그 뮤즈도 만만치 않더구나. 그러고 보면 글쓰기에 전혀 열의가 없었던 건 아닌 듯싶지만 그런 식의 요행을 바라는 걸 보면 아직 멀었다고 할 수밖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세월이 흐르자 새 살림은 다시 낡은 살림이 되었다. 새로운 활력이 그리워진 여자는 이사를 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집을 도배하고 칠을 하면서 몇 가지 살림살이를 바꿨다. 그런 참에 건강에 좋다고 소문난 돌이나 흙으로 만든 침대를 살까도 생각했지만 오래된 친구 같은 침대를 차마 버리지 못했다. 시간은 무생물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어쩌면 살아 숨 쉬는 존재보다 더 애틋한 질량으로 정을 붙이는 것 같았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노쇠한 관절처럼 삐걱거리는 프레임 나사를 단단히 조이고, 삶의 무게만큼 아래로 꺼진 매트리스를 갈아 새 단장을 시켜줘 봐도, 주름 진 얼굴을 분칠로 덮는 나이 든 여인처럼 처음의 그 광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안방에 도도하게 자리 잡은 침대. 지금 거기엔 베개 한 개와 연분홍빛 담요가 개켜져 있고, 펼쳐진 책 한 권과 노트북, 허리찜질기와 수면양말 같은 것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나란히 놓여 있던 베개 한 개는 거실 TV앞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한 공간에서 공유하고 향유하던 애哀와 락樂은 결별한 베개처럼 개별적이 되었다. 여자는 음악을 들을 때는 스피커가 연결 된 데스크 탑으로 듣지만, 글을 쓰거나 단순한 정보사냥을 나설 땐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노트북을 사용한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자의 부실한 허리는 1시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허리찜질기의 전원을 켜게 한다. 우울해진 여자는 누워 몽상에 들거나 TV 리모컨을 찾는다.
이제 여왕은 늙고 쇠잔해졌다. 그리고 고요해졌다. 처음의 위용은 간데없고 어느 구석에서도 열락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태와 태만의 온상이 돼버린 그것은 이미 가구도, 과학도 아니었다.
보루네오 섬 밀림 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알고 있을까. 친구가 머언 이국땅에서 한 고독한 귀차니스트의 생을 받쳐주는 우직하고 듬직한 ‘무수리’가 된 것을. 그 여자와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휴식공간으로 부족해 식탁으로까지 전락한 것을.
여자는 건강에 좋다는 황토색 패드를 꺼내 침대위에 깔고 그 위에 몸을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