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본 내지에 유학한 것은 교토에서 3년, 후쿠오카에서 3년, 전후 6년 동안이다.
그중에서도 교토시대의 3년은 나의 오랜 학창시대를 통하여 가장 유쾌했던 시대이다.
이에 교토 시대에 있었던 일로 지금 추억되는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그때 나는 도쿄까지 가는 길이었는데 우리 고향 친구 K와 Y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을 찾아 2,3일 쉴 양으로 그곳에 내렸었다. 그랬던 것이 이 두 친구를 떨어질 수가 없고 또 전려우아한 이 옛 도읍을 떠나가기가 싫어서 D대학 예과를 들어가게 되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재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열어주어 그 자리에서 처음 시인 정지용 씨를 만났다. 나는 그이 시를 읽고 키가 유달리 후리후리 크고 코 끝이 송곳같이 날카로운 그런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키는 5척3촌 밖에 되지 않았고 이빨만이 남보다 길었다. 그날 그는 동요 <피>와 <홍시>를 읊었다. 그 후 어떤 칠흑과 같이 깜깜한 그믐날 그는 나를 상국사 뒤끝 묘지로 데리고 가서 <향수>를 읊어주었다.
넒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황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노래는 나에게 그지없는 향수를 자아내주었다.
그래서 그는 향수에 못 이겨 곧 하숙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나를 데리고 사조 어떤 찻집으로 가서 칼피스를 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초여름 석양에 그는 나와 압천을 거닐면서 <압천>을 읊었다.
압천 십리 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젔다 ...여울 물소리...
찬 모레알 쥐여짜는 한 사람의 마음
쥐여짜라 바시어라 시원치도 않아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떴다.
비마지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 십리 ㅅ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
이 시가 노래한 그 시간의 풍경 속에서 작자 그 사람의 입으로 읊는 것을 들을 때 이 시가 주는 감명은 말할 수 없이 깊었다.
이리하여 <압천>은<향수>와 함께 정지용 시 중에서 가장 나에게 친숙한 시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그는 금단추 다섯 개를 떼어버리고 새파란 세비로 양복을 지어 입고 '참벌처럼 닝닝거리며' 귀향했다. 공처럼 퐁퐁 튀어다니는 그의 그림자가 교정에 보이지 않을 때 한 동안은 퍽 적적했다.
(김환태 1909~1944)경도의 3년, 19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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