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수필 고전산문

사라져버린 날들 / 장 그르니에

아데니움 2015. 10. 12. 12:23

 

 

2월 6일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1934년의 어떤 정치적 일화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나는 그해 2월6일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그저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하고, 그리고 오늘로 나는 한 살 더 먹었구나 하고.

 한 살 더, 그러니까 살 날이 한 해 덜, 그리하여 그 생일날 나는 바캉스를 가졌다. 바캉스란 일체의 행동이나 사고나 의사 교환이나 오락을 하지 않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휴가가 아니었다). 나는 진공을 만들려고 시간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무슨 반성을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고, 무슨 준비를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다. 과거는 분명히 죽었고 미래는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손에 잡으려면 벗어나는 것이 그 본질인 현재가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기름에 의해서 잔물결로 변하는 파도처럼 질펀해져 버릴 수는 없을 것인가? 나는 <묵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묵상이란 이 세계의 바탕과는 다른 바탕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어떤 삶을 전제로 한다. 전진과 추락이 있고 또 무슨 방향이 있는 그것은 여전히 어떤 삶인 것이다. 나는 오히려 무無가 되고 싶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그저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라.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자면 그저 잠이라고 말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몽상쪽이 보다 큰 매력이 있었다. 잠과 깨어있음 사이의 그 몽롱한 상태는 불가항력인 연속성에서 벗어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 있다는 행복한 의식을 잃지 않고, 마치 카드 요술을 부리는 사람이 <기막힌 재주>를 시작하기 전에 카드를 섞듯이 날들을 알 듯 모를 듯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러나 그 기막힌 재주가 바로 이 순간인 걸!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 새들의 비상과 저녁 새들의 비상을 서로 마주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기쁨 이상의 것이다. 오늘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일기 수첩(어원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이라는 뜻)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히 공백 상태인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 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지 않는 일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다시 맞추어 표현해 본 그때의 생각, 그 불경한 생각은 사실 이처럼 꼬집어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생각은 지중해의 햇빛을 받아 녹아버리는 것이었다. 알제에서 보낸 2월 6일, 나는 바다를 구경하려고 변두리 아랍인들 동네 꼭대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엄청난 정적...그렇다. 날씨가 나빴는데도 엄청난 정적이었다. 바람에 퍼덕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 하고 입문하려는 제자에게 티베트의 승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그 깃발인가 바람인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입니다. 그날 내 정신을 펄럭이게 하던 것은 평소에 나를 괴롭히곤 하던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쳇바퀴 같은 습관으로 타락하는 어떤 직업의 고역, 불가능해져버린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 같은 땅에 모여 살면서 서로 싸우는 가운데서가 아니라 서로 믿는 가운데서 자신의 힘을 인정해야 마땅할 이 백성들의 상호 몰이해 등 - 어떤 성질의 기쁨에 다른 사람들이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껴야만 비로소 인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한 이기주의자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그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얼마나 엄청난 정적이었던가! 나는 그 단조롭게 퍼덕이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마치 자기의 수단을 상실한 비행사가 자기에게 오는 음파만을 믿듯이 그 소리에 인도되어 갔다. 그냥 그렇게 걸어만 갔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어떤 무無를 향한 걸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잡아주고 있는 어떤 줄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장밋빛과 흰빛의 바둑판 무늬 같은 아랍인들 마을, 내 주위에 닫혀 있는 집들의 푸른빛 정면,  상자갑 같이반듯반듯한 유럽사람들의 집들, 내 발 밑에 펼쳐진 중학교의 직사각형 교사들, 팔처럼 곡선을 그리는 해군청, 군데군데 쪽빛으로 짙어지는 푸른 바다가 나를 저희들의 존재에 참여시켜주고 있었고 그 존재가 내겐 착각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의 존재보다 더 착각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는 나나 저희들이나 한결같이 아무런 의지할 버팀대도 없지만 서로서로를 지탱해주고 매순간 우리들의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이 새어나가도 속수무책이지만 서로의 피를 주고받으면서 그것 자체로 놓고 보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절대적 통일을 은밀하게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그 같은 응결상태에 단번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응결 상태는 오로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세월이 감에 따라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나는 어떤 가상의 고통 때문에 곧 그곳을 떠나버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시험삼아 그리고 마치 감방에 갇힌 수인처럼 중심에서 변두리로 한 번 나가본 것이었다. 좁은 골목, 높은 집들, 숨막히는 공기, 나는 멀리 와 있었는데도 갇혀 있었다. 어디서부터 멀리? 어디에 갇혀서? 내 주위에다가 여러 개의 뿌리들이 내리게 한 뒤에야 나는 내가 욕망했던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또 그 다음에는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과 나 자신을 분간하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행복감에 젖어서 다른 모든 것들과 가까이 있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하여 내게 필요했던 저 숨은 작업이라는 생각과 나 자신은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나의 떨어져나옴과 나의 향수라는 항상 현전하는 추억과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시 가까워지다...나는 오직 나무들, 하늘, 동물들, 침대, 탁자의 일상적인 되풀이를 통해서만, 육체적이고 자연적인 향수에 의해서만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어디 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어떤 존재를 우리들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다른 존재는 단순한 정신적 애착만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나 나약한 나는 기껏 죽은 자의 입이 흙에서 가까워지듯 가까워지는 것이 고작이다.   / 장 그르니에「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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