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에는..

3 인 3색 詩 ^^

아데니움 2018. 12. 11. 13:20



시집 세 권을 샀다.

황현산 산문집 '사소한 부탁'에 소개된 시집들이다.

그의 안목을 믿고..^^

시를 볼 때마다 하는 생각..

시인이 왜 소설가나 수필가처럼 '가'가 아니고 '인'인지를..

살아 숨쉬는 어휘 어휘들..



장석남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중

어느 겨울날 오후에 내 발은


그날 이름은 몰라

그건 7일이어도 되고 12일이어도 상관없지

평범한 어느 하루 늦은 잠에서 깨었지

베란다 창에서 햇빛 한 자락 다가왔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책을 뒤적이고 있었지

한데 어느덧 햇빛 한 자락이 문득

내 발가락 하나를 물더군

아프지는 않았지 나는

놀라지도 않고 바라보았지 햇빛은 계속해서

내 발을 먹었지 발목까지 먹었지

나는 우는 대신 깔깔대고 웃었어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지

내 발을 먹고 햇빛은 사라졌지

그날 저녁부터 난 기우뚱거리며 걷게 되었지

그런데 아무도 모르더군 내가 왜 기우뚱거리는지

아니 기우뚱거리는 것조차 모르더군

내 한쪽 발은 햇빛으로 바뀌었거든

황금웃음으로 바뀐 거거든

어느 겨울날 오후의 일이었지


김 개미 시집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중

너보다 조금 먼저 일어나 앉아


썩은 달이 지고 징그러운 아침이야, 애인아.

바람을 신으로 모신 버드나무가 미동도 않고 신을 기다리고

쓰레기봉투를 쪼던 까치는 포클레인에 앉아 꽁지를 까닥거리고 있어.

단추알만한 까치의 눈 속에서 번뜩이는 건 그래, 벌레 같은 여름 태양이야.


난 아침이면 이런 생각을 해. 이마에서 수십 개의 뿔이 돋아도 즐겁다, 즐거워야 한다, 뭐 이런...

안심해. 미치지 않았어. 최소한 네 앞에서는. 피곤할수록 눈동자가 살아나 너에게조차 위로의 속삭임이 오지 않으니 난 자주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어.


거울을 빠개는 태양, 뽑지 않아도 저절로 눈알이 녹을 거야. 태양을 떨어뜨리고 싶어.

내 머릿속에 손을 넣어줘.물파스를 발라줘. 부탁인데 입은 좀 다물어줘. 난 열린 문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난 순한 것은 즐기지 않아. 자백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아.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우린 썩은 이마를 맞대고 살아온 거야. 날개라고 알고 있었지만 등뒤에서 나온 건 새싹이었어. 그러니가 우린 열매였던 거지. 더 썩을 일도 없이 썩은... 혹시 넌 곰팡이를 키우면서도 눈군가를 기다리니? 나 아닌 누군가를?


귀에서 한 바가지씩 물이 쏟아지는 요즘은 너도 의심스러울 거야. 살아있긴 한 건가. 우린 너무 오래 함께 있었어. 같이 있어도 혼자인 우린 사라져도 사라지는 게 아니게 된 거야. 우린 이제 창자를 꺼내 심어도 서로에게 뿌리내릴 수 없어.


꿈에서라도 지붕을 뚫고 떠나, 썩은 생각만을 감싸는 두피 따위는 벌레에게나 떼어줘버려.

외로움이 길면 면도날이 없어도 스스로를 해체하는 날이 와. 그러니 애인아, 엎드려 신께 경배하자. 드디어 우린 상처 없이 함께 할 수 있게 됐어. 할렐루야.


신 영배 시집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중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나무에 기대지 않고

그 여름

푸른빛에 두 다리가 녹아들었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숲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어


계단에 기대지 않고

그 시인은 사라진 방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계단이 방의 성경을 읽는

빌딩의 숲에서

어떻게 그 사라진 방으로 들어왔을까


어떻게 사라졌을까

문을 여는 동시에


흔들린다


무너져 내리는 숲의 한 귀퉁이를 가꾸느라

나는 사계절을 다 쓴다

물에 떠내려간 초록색 입술들을 모아

한 겹 아름다운 귀를 만들고

귓속으로 숲을 옮길까

속삭이는 나무의 말들을 모을까


그날은 두 손을 씨앗처럼 땅에 묻고 돌아오던 때였지

노을 속에서 물랑이 물랑물랑

등 뒤에 손목을 감추고 나는 고백했지

죽은 것처럼 슬픈

손목에선 꽃이 피어나고 있었는데


고백하는 동시에 날아가버리는 빛을 쫓아

물랑을 물랑물랑


어떤 말로 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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