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터넷 서점 아닌
실물을 보고 고르는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시장 특유의 활기가 좋다.
고심 끝에 고른 책은 세 권, 그 중 한 권은 소설이다.
누군가는 소설이 설탕 같은 거라고 하지만
그 설탕이 요즘 메말라 있는 내 감성에는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어쩌면 소설을 읽고 난 후의 허무하고 쓸쓸한 느낌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소소한 풍경」은
상처투성이의 한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또 한 여자 얘기다.
그중 한 사람이 배제당하는 흔한 삼각구도가 아니고
셋이 한 '덩어리'가 되는 '불멸'의 사랑 얘기다.
그동안 60권쯤 소설집을 낸 작가가 두 사람만의 사랑얘기엔 이골이 났을까.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사랑얘기, 그 비밀의 봉인을 열고자 한...
내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쓰는 대부분의 소설가들,
그러나 작가는 '소소한 풍경'의 주인공들이 허구적 존재들이니
읽고나서 그들을 잊으라고 에필로그에서 스스로 말한다.
술술 잘 읽히던 그동안의 소설과 달리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생경한 한자단어가 많아서는 아닐 것이다.
간결하면서 깊고, 농익은 문체가 어쩐지 김훈스럽다.
'소소한 풍경'의 내용은 제목처럼 소소하진 않다.
'결혼이란 연애에서의 희푸른 그늘을 오로지 제거하는 합법적인 수단이고,
이 땅에서 1:1로 함께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겐
밤의 푸른 빛을 팽개쳐 사랑을 단지 패각의 무덤으로 끌고가는 숨막히는 짓에 불과하다...'
작가의 이런 정의는 단지 언어의 유희일까.
작가란 관리자의 표정을 하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실전에 약한, 분석쟁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작가는 뜻밖에도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을 등장시키는데
우물에 빠져 죽은 남자 주인공 ㄴ은 조지 해리슨을 꿈꾸는 기타리스트다.
ㄴ을 설명하려는 장치인 듯도 하고, 작가의 성향인 듯도 하고..
어쨌건 고뇌 같은 건 놓아버린 듯한, 편안하고 조용한
노작가의 내면이 보이는 듯하다.
인도인의 흰옷을 입고 힌두의 만트라를 암송하면서 죽어갔다는 조지 해리슨.
폴 메카트니와 존 레넌 뒤에 서 있던 그를 새롭게 들여다보게 됐다.
조지 해리슨 All things Must pass
'아침노을은 오전 내내 이어지지 않고
폭우도 하루 종일 이어지지 않습니다.
내 사랑도 예고 없이 당신을 떠나는 것 같지만
언제나 그런 식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소멸합니다.
모든 것은 죽게 마련입니다.
저녁노을은 저녁 내내 계속되지 않고
마음만이 저 먹구름을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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