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릇된 욕망

아데니움 2010. 8. 20. 23:14

 

 

   그릇된 욕망

 

                                                                      김소현

 

 

  일상의 존재들이 시들해질 때, 즐겨듣던 음악이 소음이 되고 알 수 없는 권태가 몸을 휘감을 때면 생동감 있는 예술의 현장으로 눈길이 쏠린다. 벼르던 연극을 보러가던 날, 모처럼 자유를 맞은 심신은 따사로운 햇살만큼이나 평화로웠고, 오랜만에 찾은 대학로 거리는 넘치는 공연, 젊음의 활기가 어우러져 봄의 기운이 충만했다.

  동숭아트홀은 일반 극장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아담한 실내에 검은 막이 드리워진 무대는 운치로 가득했고, 살아있는 예술을 기대하는 관객들로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즈 원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중학교때 내용도 모르고 읽은 기억이 나지만, 비비안 리 말론 브란도 주연의 영화를 본 이후 연극으로는 처음이었다.

  명문가 출신의 블랑쉬는 재산과 명예를 다 잃고 빈털터리의 몸이 되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동생 스텔라가 사는 뉴올리언즈의 허름한 아파트로 오게 된다. 폴란드 출신 노동자로 거친 성정을 지닌 스탠리(동생남편)와, 가진 거라곤 화려한 옷 몇 벌과 공허한 자존심 뿐인 블랑쉬는 사사건건 부딪치며 서로를 경멸한다. 허울뿐인 처형의 과거를 알게 된 스탠리는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러 간 사이 그녀를 능욕하고, 그 장면은 막이 내리며 어두워지는 조명만큼이나우울함을 안겨주었다. 그녀를 흠모하던 동네청년 미치도 그녀의 과거를 안 뒤에는 청혼하려던 마음을 접는다.

  마지막 막이 오르고, 블랑쉬는 동생부부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파티에 가는 줄 알고 한껏 차려입은 그녀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딘지 비로소 깨닫고 겁을 내며 자조적인 마지막 대사를 뱉는다.

 "난 그저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했을 뿐인데..."

 강제로 끌고가려는 간호사에게 강하게 저항하던 그녀가 마치 무도회의 신사인 양 부드럽게 손을 내미는 의사를 따라나서는 장면에서 눈물이 나왔다.

  욕망의 근원은 무엇인가. 꿈과는 다른 현실적인 결핍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심리일 것이다. 퐁요한 영혼을 가졌노라 절규하듯 외치던 블랑쉬의 영혼은 텅 비고 남루하였다. 그릇된 욕망은 참담한 결과를 낳는다. 연극을 보며 영화 '애수'에서의 비비안 리를 떠올렸다. 발레리나였던 그녀도 전쟁과 함께 생활고 때문에 거리의 여자로 전락했지만, 블랑쉬는 언젠가 백만장자로부터 구애를 받을 거라는 비현실적이고 헛된 욕망을 좇으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에 빠져 불행한 여인으로 전락한다. 잘못 살아온 여자에 대한 사회의 냉대와 그것을 알고 난 후의 남자들의 태도가 씁쓸하다.

  쇠잔한 안색과 분위기로 역할에 충실했던 비비안 리의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배종옥이 연기한 블랑쉬 역은 그러저럭 어울렸으나 높은 톤의 쇳소리는 극의 분위기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배우로서의 매력을 십분 발휘했지만 화사하고 예쁜 외모에서 그늘과 우수가 배어나오는 연기란 쉽지 않은 내공일 게다.

  연극이 끝난 후, 블랑쉬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착잡해진 나는 어스름이 깔리는 바람 부는 대학로에 이방인처럼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우연히 눈에 띈 재즈클럽으로 들어갔다. 실내를 둘러보니 이십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다. 원하는 음악을 듣고자 하는 욕망으로 반짝이는 눈빛들, 재즈를 듣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약간은 기묘하면서도 신선해보였다.

  나의 욕망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충족되었다. 재즈가수 말로를 닮은 긴 퍼머머리 롱부츠 차림의 젊은 여가수가 현란한 스캣이 섞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어 그녀가 '서머타임'을 부를 때 나도 모르게 환호했다. 그에 대한 답례인지 그녀는 무대가 끝나자 자리에 와 인사를 하였고, 음료수 한 잔을 권하자 앞에 앉아 짧은 신상얘기를 들려주었다. 모 지방대학 실용음악과 교수이고 미국에서 재즈를 공부했으며, 이혼하고 초등학생 아들이 있다고... 술 한잔의 감상이었을까. 나는 순간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녀는 고맙다며 명함 한 장을 건네고 사라졌다. 스캣재즈는 단순히 어려운 노래만은 아니었다.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절박함이 깃든 눈물겨운 삶의 노래였다.

  귀갓길에 오르며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것은 배우도 가수도, 관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은 오묘한 감정의 동물이니 이런저런 욕망을 품고 산다. 그것을 이루지 못해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고 삶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더 나은 삶 - 부와 명예, 만족할 만한 외모와 내면을 갖기 위해 가쁜 숨을 내쉬지만 그 결과가 늘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늦은 밤, 어둡고 한적한 거리에 긴 퍼머머리, 롱부츠를 신은 여인들이 눈에 띈다. 그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탑승하려는 블랑쉬인지 건전한 욕망을 위해 분주한 발길을 옮기는 재즈가수인지 잘 모르지만, 내 귓가엔 혼신을 다해 열창하던 '서머타임'이 맴돌고 있었다.

 

(2010 현대수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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