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 사랑 내 곁에

아데니움 2009. 9. 2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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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 내 곁에



                                                                       김소현

  



  순전히 날씨 탓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멜로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것 같은 하늘과 눈에 띄게 쇠락해가는 나무들이 가만있지 말고 멜로영화라도 한 편 보며 이 계절을 향유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내용이 시시하면 오래전 요절한 가수 김현식의 노래라도 건질 수 있겠지 하고, 나는 짐짓 가을 여인 흉내를 내며 영화관으로 향한 길이었다.

  차라리 펑펑 울기를 바랐다. 기왕에 볼 멜로영화라면 실컷 울기라도 하지 않을까 해서 선택한 영화가 「내 사랑 내 곁에」다. 배우를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나는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를 믿고 그 연기를 기대했다.

  영화는 불치병을 앓는 남자와 장례지도사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진 여자의 짧은 사랑이야기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고향 후배에게 상복을 입고 흰 국화 한 송이를 건네며 프러포즈를 하는 병든 남자 종우와, 직업 때문에 두 번씩 이혼하고 또 죽어가는 한 남자를 보듬어 안은 여자 지수의 사랑이 애틋하게 펼쳐진다. 병이 위중해지면서 남자는 여자에게 짜증을 내며 괴롭히는데, "인생이 나를 갖고 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 며 아픈 중에도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남자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남은 여자는 늘 하던 것처럼 남편의 사체를 정성껏 닦고 염한다.

  영화 중간, 같은 병실에서 몇 년씩 의식도 없이 누워만 있는 남편을 붙잡고 오열하는 중견 여배우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솟았다. 조연배우들의 코믹한 연기로 객석에선 웃음이 터졌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불편하게 숙식을 해결하며 오랜 간병생활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그네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우가 입원해있던 6인 병실 풍경은 일 년여 전의 암 병동 6인실을 생각게 했다. 갑작스럽게 남편이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열 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고, 보호자 대기실에서의 초조한 기다림의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중환자실을 거쳐 들어간 6인실은 무력한 환자와 우울한 보호자 열두 명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인연이라면 인연이랄 수 있는 그 열두 명은 한 공간에서 가족의 일원처럼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울하면서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던 그곳에는 남편을 제외하고 거의 노년에 접어든 남자 환자들이 있었는데, 주로 후두암이나 설암으로 목에 관을 꽂아 음식을 먹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해 종이에 글을 써서 소통을 하곤 했다. 평생 처자식 부양을 위해 밥벌이를 하다가 나이 들어 병을 얻고 왠지 부인의 눈치를 보며 병든 소처럼 누워만 있던 초로의 남자들을 보며 고단하고 측은한 ?남자의 일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어날 때는 왕이지만 결혼과 함께 당나귀가 되어 가정을 등에 지고 터벅거리며 걸어가다가, 중년(개)이 되면 가족부양을 위해 사람들에게 호의를 구걸하고, 노년에는 어린이(원숭이)가 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탈무드


  먹지 못하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밥 먹듯이 밥을 굶던 나는 며칠 후에야 다른 보호자들의 손에 이끌려 한쪽 구석에서 죄인처럼 밥을 먹었었다. 환자는 몸이 아파서, 간병인은 정신과 육체 모두가 힘들어서 괴로운 게 병원생활이다. 퇴원과 함께 나의 얼치기 간병인 노릇도 끝이 났지만, 다시는 가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병실의 추억이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애환을 좀 더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영화는 끝이 났으나 주인공의 연기는 훌륭했다. 한 영화를 위해 20킬로그램의 체중 감량을 한 명실상부한 프로 배우인 그는 감량 과정에서 실제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돈과 명예 때문도 아니고 진정한 배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점점 수척해가는 그의 모습은 연출된 장면이 아니기에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피골이 상접해 죽어가는 그 얼굴에서 ?강마에’를 본다. 어떤 역할을 해도 맑은 카리스마가 풍기는, 귀티 나는 그가 좋다. 배우로서 작품에 임하는 그 철저함과 치열함을 사랑한다.

  우물쭈물 제자리걸음 하던 눈물은 영화 끝에 나오는 O S T를 들으면서 덩어리졌다. 한 생명이 소멸해가는 과정은 소멸의 계절인 이 가을을 눈물로 적시기에 충분할 것 같다. 혼자 본 영화의 뒷담화는 맥주 한 캔과 함께이다. 짙푸른 하늘과 서늘한 햇볕, 그리고 영화에서 요절한 김명민이 부른〈내 사랑 내 곁에〉도 함께.

 

 

( 에세이스트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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