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조용한 가족

아데니움 2006. 10. 28. 15:41
 

조용한 가족

 

 

김소현

 

 

해가 뜨고, 시계바늘이 몇 바퀴는 돌았음직한 시간인데도 동네가 조용하다. 역시 휴일은 휴일이다.

 가족은 각자의 공간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은 거실에서 바둑프로를 보고 있고, 한 사람은 제 방에서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있다. 컴퓨터 과학을 공부중인 아들은 전공과목과 관련 없어 보이는 게임에 열중하고, 아내는 안방에서 TV화면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간간이 책장을 뒤적거리고 있다.

거실 창으로 햇살이 길게 들어와 체리빛 식탁의 다리를 붉게 비출 때쯤, 아내가 조용히 방을 나와 달그락거리며 점심을 준비한다. 이윽고 한 마디,

“식사해.”

남편과 아들이 조용히 식탁에 와서 앉는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밥을 먹는다. 침묵이 우스운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사오정이 딸과 함께 산책을 나섰는데 걷다 보니 신발이 짝짝이더래. 그래서 딸에게 집에 가서 신발을 가져오라고 시켰대. 그랬더니 딸이 와서 하는 말이 ‘집에도 짝짝이밖에 없어요….’ 웃기지?”

남편과 아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조용히 계속 밥을 먹는다. 먹는 ‘일’이 끝나자 일어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마치 로봇 같다. 아내는 이 반응 없는 개그에 이골이 났는지 무안해 하는 기색도 없이 혼자 웃는다. 평소 웬만한 질문에는 대답을 들을 수 없기에 ‘집에 불이 나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인간들‘ 이라고 혼잣말을 한 뒤 설거지를 하고, 왠지 맥 빠진 매무새로 방으로 들어간다.

시간이 흘러 고즈넉한 집안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아내는 나른한 몸을 주방으로 끌어 또 다시 저녁을 준비한다. 뚝배기에서 끓고 있는 멸치를 건져내고 된장을 조금 푼 뒤 호박과 두부를 썰어 넣고, 아내는 잠시 고개를 돌려 아파트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틈새로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 눈길을 준다.

잿빛과 초록이 섞인 하늘 아래 산의 능선은 이미 어둡게 침잠해 있다. 초록 일색이던 그곳에 이제 막 짓기 시작한 아파트 공사장 건물이 신기루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동향의 아파트는 운이 좋으면 거실에서 해가 떠오르는 장관을 볼 수도 있었는데, 새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 그나마 숨통을 틔워 줄 전망도 사라질 판국이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아내는 썰어놓은 파를 찌개에 털어 넣는다.

침묵이 견디기 어려운 아내는 이번에는 밥상을 차려들고 TV앞으로 가져간다.

 

“저녁 먹어.”

남편과 아들은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면서도 눈과 귀는 화면에 고정시킨다. 상을 물린 후 설거지를 하며 아내는 묘한 안도감에 젖는다. 세 사람 외에 TV가 함께 했기 때문일까. 잠시 집안에 활기가 넘치는 것 같다. 온 국토가 붉은 열정으로 뜨거운 월드컵 시즌, 세 사람은 모처럼 모여앉아 축구를 본다. 아내는 이따금 탄성을 지르고 한숨을 내쉬는데 두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드디어 한국이 어렵게 골을 넣자 남편과 아들이 박수를 친다. 아내는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흔한 고함도 치지 않고, 조금은 경박하게 굴어도 괜찮을 상황이건만 그들이 최대의 기쁨을 표현하는 수단은 고작 박수뿐이다. 신나는 응원가만으로도 감격에 겨워 어깨를 들썩거리는 아내는 어쩐지 외롭다. ‘세 사람 다 같은 혈액형인데….’ 하면서도 아내는 안다. 그 박수에 얼마나 뜨거운 마음이 들어 있는지를.

젊은 날 한때, 술을 좋아하는 남편이 마치 활화산이 폭발하듯 한 번씩 울분을 토해내면 온 집안이 들썩거렸다. 그때마다 아들은 말이 없어지고 아내는 표정이 없어졌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고 남편의 머리에 조금씩 서리가 앉기 시작하면서 사화산처럼 서서히 용암은 잦아들고 집안은 비 오는 사찰처럼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은 폭풍전야의 그것은 아니고, 가정이 형성되고 서로간에 깊은 유대가 생긴 이후 모든 것을 인내하고 수용한 뒤에 만들어진 조용함이다.

친정엄마를 잃은 아내가 슬픔에 젖어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 아들은 조용히 어깨를 내주었고 남편은 말없이 손을 잡아 주었다. 누군가 긍정을 말할 때는 부정을 말하기도 하지만, 부정을 얘기할 때는 긍정으로 답할 줄 아는 이 가족의 심성은 믿을 만하고 미래는 어둡지 않다고 아내는 생각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외딴 산장도 아니고 시체를 묻을 마당도 없으니 ‘조용한 가족’은 범죄를 공모할 일은 없을 것이고, 서로에게 적당히 무관심하며 순수한 눈빛을 말없이 교환하면서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에 가끔 신산한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은 아니다.

휴일 하루가 침몰하고 있다. 구름 사이로 뜨거운 몸을 숨기는 서해의 낙조처럼….

어두워진 창밖을 내다보며 아내는 습관처럼 또 한 번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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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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