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탱고

땅고, 행복한 중독

아데니움 2017. 12. 11. 09:55



 
                       
                                                                                                                                

지붕이 열리는 국립극장 하늘극장에 아르헨티나 탱고가 도착했다.
  오래전 예매하고 기다린 공연 '탱고, 로망, 그리고…포옹'이다. 로맨틱 탱고 위크 조직위에서 주최하고 아르헨티나의 남녀 탱고마스터와 한국, 대만, 일본을 대표하는 탱고댄서가 함께 하는 탱고컬 공연이다.
  예술이 있는 곳은 공기가 다르다. 초가을 저녁의 맑은 바람이 더해 극장 입구에서부터 기분 좋은 에너지가 피어오른다. 아담한 원형극장에 탱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속속 입장했다.

  앞자리의 젊은 여인이 겉옷을 벗고 드레스 차림으로 앉는다. 공연 후의 밀롱가(탱고를 추기 위해 모이는 장소)를 대비한 듯하다. 은은한 조명 아래 원탁 서너 개가 놓여 있는 무대는 연극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정장에 페도라를 쓰고 가방을 든 젊은 남성이 등장한다. 아르헨티나가 경제부국이던 시절 유럽으로 유학 갔던 페르난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친구 카를로스와 만난다. 반갑게 조우한 그들은 밀롱가에서 친구들을 만나 탱고파티를 연다. 정장한 남성들과 머리를 뒤로 쪽지고 긴 타이트스커트 차림의 여성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보는 이를 아찔하게 만드는 충만한 곡선의 미…. 절도 있는 고갯짓 없이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치거나 다리를 뒤로 쭉 뻗어 원을 그리고, 리듬에 맞춰 이리저리 날렵하게 차면서 간간이 회전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백조처럼 우아하다.
  가까이에서 보는 춤도 좋았지만 아르헨티나 스페셜 탱고밴드 ‘솔로땅고 오르케스타’가 연주하는 격조 높은 음악은 당장 그곳으로 떠나고 싶을 만큼 심장에 울림을 주었다. 음악이 고급스러우니 춤도 그렇게 보였다. 피아노, 바이올린, 더블베이스, 그리고 반도네온 연주자들은 악기를 가지고 노는 듯 노련했다. 
  반도네온은 탱고의 영혼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이 악기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들어진 춤이 탱고라고도 한다. 러시아민요 같은 애수가 느껴지는 음악, 피아졸라의 익숙한 선율이 부드럽게, 때로 절도 있게 이어졌다. ‘오블리비언(망각)’도 저 시원으로부터 기억을 불러오는 듯 조용하고 아득히 흘렀다. 내 휴대폰에 전화를 걸면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온 신경이 음악에 집중됐다.
  천재 반도네오니스트라 불리는 라우따로 그레꼬의 연주는 그에게 연심이 생길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내가 앉은 S석에서는 그들의 옆모습이 보였는데 나는 미소 지으며 연주하는 반도네오니스트의 군살 없는 턱 선에 시선이 자주 갔다. 뒷모습만 보이는 피아노 연주자는 페달을 사용하지 않고 두 발로 리듬을 치면서 춤추듯 온몸을 움직이며 건반이 부서져라 두드려댔다. 
  공연이 끝나자 천장이 열리고 검은 하늘이 보였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그리고 관객이 직접 참가하는 밀롱가가 이어졌다. 댄서들과 관객이 함께 땅고를 추는 순서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남녀들이 구두를 갈아 신고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무대로 나간다. 무대는 순식간에 파티장이 되었다. 나는 몸이 움찔거렸지만 내 실력으론 어림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세계적인 탱고밴드 '솔로 땅고'가 반주해 주는 무대에 서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 옛날,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카 지역에는 유럽에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이 있었다. 일과가 끝나고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춤을 추었다. 포르투갈  선술집에서 어부들이 Fado를 들으며 애환을 달래듯 그들은 춤을 추며 향수를 달랬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연회장에서 왈츠를 추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류층들은 땅고를 저속하게 여겨 천대했다. 흑인 빈민가에서 출발한 재즈 음악의 운명이 그랬듯이….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돌풍을 일으킨 탱고는 어찌된 일인지 그 상류층에 의해 다시 돌아와 스테이지 탱고로 자리 잡고 오늘에 이르렀다. 열정적인 눈빛을 마주한 채 엮어가는 탕게로스(탱고춤을 추는 사람)의 관능적인 춤은 세계무형유산이 되었다.
  탱고하면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맹인 알 파치노가 젊은 여인과 함께 추던 춤이  떠오른다. 나는 영화는 미처 못 보고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동영상만 찾아보곤 한다. 유명한 그 음악 Por Una Cabeza는 경마용어로, 간발의 차이로 끝난 아슬아슬한 승부를 의미한다고 한다. 경마로 돈을 날린 남자가 경마의 중독을 매력적인 여인과의 사랑에 비교하는 심정을 그린 음악이라 하니, 탱고와 경마는 아마도 빠져나올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이 닮은 건 아닐지.  
  탱고음악의 기본이랄 수 있는 라 쿰파르시타는 아르헨티나 탱고의 고전이다. 내가 절도 있고 리드미컬한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는 듣는 음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그 끈끈한 리듬을 느낄 수 있게 됐다. 탱고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춤이지만 사랑하는 남녀에게 어울리는 로맨틱한 춤이다. 삼바나 자이브 같이 신나게 리듬을 즐기는 춤에 비해 탱고는 화려하면서도 노동자들의 비애가 배어나오듯 우수어린 춤이다. 음악에 젖어들고 내면의 감성이 표출되면 배우가 애드리브를 하듯 즉흥적 동작이 나오기도 한다.
  탱고는 정열, 매혹, 사랑, 관능의 수식어가 붙는 춤이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행복한 중독'이 맞는 것 같다. 영혼을 데워주는 땅고가 내겐 로망이다. 무대에서 함께 할 땅게로(탱고 추는 남자)가 없으니 솔로땅고 음악을 들으며 그 느낌을 대신한다.


                                                                                                        2017. 현대수필 겨울호 문화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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