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는지 시야가 온통 잿빛이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박춘삼의 목소리가 유난히 흐느적거린다.
'회색탁자 위에 오늘도 빨간 촛불 흔들려….’
흔들리는 촛불과 함께 나의 눈동자도 흔들린다.
'회색탁자'는 수 년 전 인터넷 카페에서 우연히 들은 노래다.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은 박춘삼이라는, 예명인지 본명인지 모를 가수의 촌스런 이름과 회색탁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노래제목에 매력을 느껴서이다. 생각의 우물로 빠뜨리는 그 제목이 나를 따라다닌다. 왜 회색일까.
평범한 7080 가요중 하나인 이곡은 그러나 뭔가 특색이 있다. 성인가요 특유의 끈적임도 없고 젊은 취향의 맑은 느낌만도 아닌 중간적 느낌, 회색의 느낌이다.
따사롭게 들리는 노랫소리도 좋아
그저 앉아만 있고 싶은 지금
거리를 나서면 싸늘하게 다가오는 어두움
어두움 속에 어제의 느낌이 가득하면 어찌 할까요
아늑한 현실에서 따스한 노래를 들으며 영원히 앉아 있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밖의 어두움에 대한 걱정으로 고민하는 성정이 나타난다. 탁자에 굳이 회색을 붙인 까닭은 고뇌를 말함이다. 흔들리는 촛불이 그 마음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가수 박춘삼은 지금은 목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노래는 삶의 어두움과 밝음의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 자신보다는 누군가의 위로가 되는 가사가 대부분이다. 부드러운 목소리만큼 따스한 심성이 드러난다. 그는 어두운 이웃의 영혼을 외면하지 못하고 목사가 된 것 같다. 부귀영화를 곁에 두고도 만족을 못하고 고행의 길을 떠난 싯다르타의 영혼을 닮았다.
회색이 주는 이미지는 고독과 우울이다. 밝지 않고 투명하지 않은 무채색이고 단조의 색이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11월의 황량함을 닮은 색이고 흐린 날의 서해바다 얼굴을 닮았다. 노년과 청년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는 평범한 중년을 가리키기도 하고, 습한 바람이 스산하게 불던 마카오 거리를 연상시킨다.
회색은 영어로는 '그레이’지만 블루’의 뜻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하늘과 바다의 색이고 콘크리트를 연상시키는 도시적인 색깔이다. 검정으로 신비를 치장하지도 않지만 순백의 순수로도 나서기 싫어하는 모호한 회색분자의 성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비겁함이 때로는 합리와 절충의 갑옷을 입고 용맹을 떨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회색의 기억이 많다. 색채로서의 회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나 표정 없는 얼굴과 가라앉은 분위기 탓인지 트레이드마크처럼 나의 이미지는 회색을 닮았다. 그러나 그 회색의 뒤에는 늘 초록이 건강하게 숨 쉬고 있고 초록의 옆에는 빨강이, 때로는 보라가 간간이 얼굴을 내밀며 우정을 과시한다.
중용을 미덕이라 여기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디케의 저울'- 양손에 칼과 저울을 쥐고 있는 정의의 여신 - 처럼 살면서 그것이 모호함으로 비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마음을 활짝 열고 그 마음만큼 행동한 적이 거의 없다. 늘 주변의 이목을 살피며 내 안일만을 신경써왔다. 둥지를 뛰쳐나갈 용기도 없었고 주저앉아 행복하다고 외치지도 않았다. 인내를 키우며 냉소와 관조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도 마음 안에서 끓고 있는 뜨거운 뭔가를 잠재워야 했다. 그러는 가운데 나를 둘러싼 공간은 뚜렷한 흑백에서 점점 불투명한 회색으로 변해갔다.
나는 지금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부동의 자리에 앉아 있다. 구멍 뚫린 현무암 돌담 사이로 빠져나가는 제주의 바람처럼 무수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탁자 위의 촛불은 흔들릴 뿐 꺼지지 않았다. 마음 속 깊숙이 심지를 내린 빨간 촛불은 회색의 탁자를 온화하게 비추며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갈망으로 결집된 권태의 자리였으나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바라보며 오늘의 자리에 앉아있다. 단단한 나의 회색탁자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