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수필 고전산문

이덕무의 '인생예찬'

아데니움 2012. 4. 28. 12:00

 

<서문>

 

사물은 진짜를 통해 형성되고, 만사는 진짜를 통해 영위된다.

따라서 진짜의 확립을 맨 앞에 두었다. 진짜를 확립한 뒤에 제 운명을 살피지 않으면 적체될 것이다.

따라서 운명의 관찰을 그 다음에 두었다. 운명을 관찰한 뒤에 미혹을 병으로 여기지 않으면

방탕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미혹의 거부를 그 다음에 두었다.

미혹을 거부한 뒤에 남의 훼방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 해코지를 당할 것이다.

 따라서 훼방으로부터의 도피를 그 다음에 두었다.

훼방으로부터 도피한 뒤에 영혼이 즐겁지 아니하면 몸이 수척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즐거움을 그 다음에 두었다.

영혼이 즐거운 뒤에 진부함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고루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진부함의 제거를 그 다음에 두었다. 진부함이 제거된 뒤에 벗을 가려서 사귀지 않는다면

방종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벗의 선택을 그 다음에 두었다. 기가 이 우주에 모여 있기에

사물도 있고 사건도 있어 마치 장난 같은 점이 있다. 따라서 우주의 희롱으로 글을 끝맺었다.

이를 총괄하여 적언이라 이름하였으니 삼소자를 위한 글이다.

 적이란 즐거움이요 편안함이니 ,"나의 인생을 즐기고 나의 분수를 편안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삼소자는 그 태도가 온화하고도 순종적이며, 마음가짐이 참으로 작고도 내밀하다. 조심스럽게

자기를 지키고, 여유롭게 노니는 자이다. 내가 그를 아름답게 여겨 여덟개의 찬을 짓는다.

 

1.진짜의 확립

 

설록(녹색물감)으로 눈동자 새기고, 유금(노란색물감)으로 날개 물들인 나비가

선홍빛 꽃받침을 빨면서 하늘하늘 긴 수염을 말아 올리고 있다.

약삭빠른 날개짓을 몰래 엿보며 똘똘한 어린애가 오래도록 기다리다가

별안간 치고 살짝 잡았으나 산 것이 아니오, 그림 속의 나비였구나!

진짜에 가깝고 몹시 닮았다 해도 하나같이 제 이의 자리에 머무는 법,

진짜에 가깝고 몹시 닮은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똑똑히 살펴보라!

진짜 물건을 먼저 보아야만 가짜로 인해 속박당하지 않나니

갖가지 수많은 물상은 이 나비의 비유를 본보기로 삼을 일이다.

 

2. 운명의 관찰

 

이름은 현부요 조화옹인 분이

크나큰 양성의 기관을 도맡아서 하늘을 용광로로 삼았다.

질펀하게 기운을 걸러내고 탁하고 맑은 것을 가려내어

사물마다 운명을 부여했으니 그 오묘한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여야지.

후하다고 은혜랄 것 없으니 박하다고 또 원통해하랴?

운명을 미리 엿보면 조급증에 걸리고, 교묘히 도피하면 흉한 법,

어제 할 일 어제 하고 오늘 할 일 오늘 하며, 봄에는 봄 일 겨울에는 겨울 일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여 처음처럼 끝을 맺으리라.

 

3.미혹의 거부

 

인간의 큰 근심은 혼돈이 뚫린 태초부터 발생하여

꾸미고 수식함은 넘쳐나고 진실과 소박함은 사라졌다.

에 곯고 재물을 탐하며, 눈짓으로 말하고 이마로 꿈쩍이며

혀를 부드럽게 굴려 달콤한 말 꾸며내고, 뱃속과는 반대의 말로 칼날을 숨긴다.

앞에서는 절을 하고 뒤에서는 비판하며, 벗이라고 끌어다가 면전에서 망신 주니

빼어난 기상은 허물을 잉태하고 화려한 재능은 횡액을 불러들인다.

선비가 장사치의 돈꿰미를 탐내고, 사나이가 아녀자의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다.

어째서 품성의 배양을 잊는 것일까? 복록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4.훼방으로부터의 도피

 

재능이 명성을 부르지 않아도, 명성은 반드시 재능을 따르고

재앙이 재능에 달라붙지는 않으나 재능은 반드시 재앙을 초래한다.

재앙을 스스로 길러냈겠는가? 사실은 훼방이 불러들이는 법.

좋은 거문고는 쉽게 상하고 잘 달리는 말이 먼저 들피가 지며,

기이한 책은 좀벌레가 망가뜨리고 아름다운 나무는 딱다구리가 쓰러뜨린다.

빛나는 재주를 자랑하자니 해코지를 재촉하고 귀를 막고 있자니 바보에 가깝다.

바짝 다가가지도 말고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말자. 그러면 복된 세계가 따로 열리겠지.

자연이 준 제 바탕을 지켜서 무고한 시기를 멀리 떠나보내자.

 

5. 영혼의 즐거움

 

물고기는 지혜롭고 새는 신령하며,바위는 수려하고 나무는 곱다.

내 정신은 저 자연의 경물과 어울려 즐겁고,정감은 장소를 따라 옮겨간다.

법은 어찌 옛 것만을 따르랴? 양식은 속된 것에 이끌리지 않으리라.

오묘하고 빼어난 문심을 특별히 갖추어 장애와 구속을 시원스레 벗어나리라.

대지를 흐르는 가을물, 하늘에 떠 있는 봄구름처럼

마음의 지혜와 눈동자는 영롱하기 가이없다.

구태여 술잔을 재촉할 필요없고 거문고 줄 빠르게 타지 않아도 좋나니

턱을 괴고 낭랑하게 시를 읊조리면 묵은 병조차 어느새 사라질 것을.

 

6. 진부함의 제거

 

표범이 말을 낳고 말이 또 사람을 낳은 일도 있듯이

변화의 계기는 매인 데 없고 계승과 혁신은 늘 새롭게 일어난다.

구속받는 선비는 좁은 문건으로 옛사람이 뱉어놓은 말만을 귀하게 여기지만

한 단계를 뛰어넘기는커녕 늘 얼마쯤 뒤떨어져 있다.

남의 걸음걸이를 배우다보면, 오히려 절뚝거리게 되고 서시를 훙내 내려 이맛살을 찌푸린다.

위대한 작가는 진실을 꿰뚫어보고서 썩은 것과 낡은 것을 씻어던지니

말의 외양을 무시하여 천리마를 얻은 구방고처럼

옛것과 지금 것을 저울질하는 그의 눈동자는 크고도 진실하다.

 

7. 벗의 선택

 

앞의 사람은 보지 못하고 뒤에 올 현인은 미치지 못하니

멀리 떨어져 어울리지 못하면 속마음을 누구에게 털어놓나?

크나큰 인연으로 같은 세상에 태어난 벗과

화기롭게 얼굴 맞대고서 가슴 활짝 열어보인다.

안방을 같이 쓰지 않는 아내요 동기가 아닌 형제 사이이니

살아서는 괄시하지 않고 죽어서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학문은 보태주고 재능은 장려하며, 허물은 질책하고 가난은 구제하건만

기생충 같은 놈들은 뱃속에 시기심 채워 등 뒤에서 헐뜯는다.

 

8. 우주의 희롱

 

내 앞에도 내가 없고 내 뒤에도 내가 없다.

무에서 왔다가 다시 무로 돌아간다.

많지도 않은 오직 나 혼자이니 얽매일 것도 구속될 것도 없다.

갑자기 젖을 먹던 내가 어느 사이 수염이 자라고

어느 사이 늙어버리더니 또 어느 사이 죽음을 맞는다.

큰 바둑판을 앞에 두고 호기롭게 흑백의 돌을 던지는 듯,

큰 연희무대 위에서 헐렁한 옷을 입은 꼭두각시인 듯,

조급해하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하늘을 따라서 즐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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