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글(필사)

밤의 순례 / 오정희

아데니움 2015. 2. 7. 22:14

 

이른 저녁을 먹은 뒤 설거지를 마치고, 어머니가 티브이 앞에 자리 잡고 앉으시면 나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집을 나선다. 건강을 위한 산보이거니 생각하시는 노모가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똑같다. 어둡고 호젓한 길로는 다니지 말라거나 차 조심을 하라거나, 날씨가 쌀쌀해지면 감기 들지 않게 옷 단단히 입으라거나....

 한때 전국토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녀보리라 했던 적도 있건만 나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도보여행은커녕 자전거 타기도 배우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글을 쓰고 말하는 일들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즉 소설 쓰는 일이 어려워진 것이다. 대학시절, 시를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는 "뮤즈의 신은 질투가 많아 자기 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새삼 떠올리며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신을 섬기고 있는가, 내게 소설과 삶은 서로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라고 자탄하며 종종 쓴웃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소설이란 결국은 탄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이야기이니 인간의 삶이 존속하는 한 소설은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거나, '소설이란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거나 하는 말에 기대어 글쓰기에의 열정과 자신감을 부추기기도 하고 때로 자신의 게으름과 불성실함을 호되게 나무라기도 하지만, 결국 소설 쓰기가 힘들다는 것은 삶이 힘들고 섣부르게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 미묘하다는 깨달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껏 내 삶의 두 축은 생활인으로서의 '살기'와 소설가로서의 '쓰기'였고 그 둘의 균형 잡기에 적지 않은 안간힘을 써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바로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글쓰기가 곧 삶 쓰기라는, 즉 사유와 쓰기의 진정성이 바로 아름다운 삶의 실천이 되리라는 소박한 믿음에서 출발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일상의 요구와 창작에의 욕망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공간에서 생겨난 것이 내 소설이었던 셈이다. 가까운 친구는 내게, 지나치게 생활의 벽에 갇혀버린 게 아닌가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살면서 치러내는 것들은 얼핏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의 반복일 수 있지만 그 작은 것들이 쉬임없이 희로애락의 정서로 흔들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변질시킨다. 멀리서부터 조금씩 밀려오는 파도처럼 모르는 새 발목을 적시고 종아리로 차오르며 우리의 키를 넘어버린다.

 작가란 바다에 걸어 들어가듯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물이 배꼽에 차오를 때까지만 들어가야 한다거나 삶에 너무 매여 있으면 삶을 명확히 볼 수 없다고 설파한 플로베르의 말에 의하면 나는 아마 싦의 일상성과 글쓰기의 그 아슬아슬하고 엄혹한 경계에서 추락하여 익사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고도의 훈련을 쌓은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도약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후련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생활, 인생에서 단번에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은 없다. 밥도 한 숟갈씩 먹으며 그릇을 비우고 먼 길도 한 걸음씩 떼어놓으며 천 리를 가고 생활의 벽도 한 칸 한 칸 손톱을 박아가며 기어오르는 것이고 완성과 초월에 이르는 길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자신의 소명 즉 글쓰기의 운명에 대한 확신 또한 감상이고 오만이었던가.

 글쓰기가 사라진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건만 그런대로 삶은 관성의 법칙과 타성에 의해,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소소한 기쁨과 자잘한 근심 걱정으로 무늬를 짜 넣으며 무탈하게 흘러갔다. 글을 쓸 수 없는 삶이란 곧 죽음이리라는 비장함을 지녔던 지나간 한 시절이 젊음의 열정과 치기로 미소 속에 돌아보아지기도 했다. 규범과 관습, 질서에 충실한 생활에는 단정하고 평범한 삶의 미덕과 평안함이 있었다. 오랜 방황과 괴로움 끝에 찾아온 생과의, 세상과의 화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열망하는 자의 몫이라거나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을 순하게 받아들이겠노라는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괜찮다, 그런대로 다 괜찮다라고 스스로 위로하는 마음의 속삭임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예컨대 영화 <서편제>나 <내 책상 위의 천사>등의 영화를 보면서 보다 높은, 또 다른 세상의 출구를 향한 갈망과 열정에 몸이 뜨거워지며 거친 격정으로 울기도 하였다.

 그 평온하던 어느 저녁, 창가에 어둠이 드리우고 어머니와 내가 이쪽저쪽의 의자에 갈라 앉아 우두커니 티브이 화면을 응시하다가 나는 문득 어둠이 서리는 창밖에 눈길을 주며 귀를 세웠다. 거실 안의 정경이 음화상으로 떠 보이는 창가에서 누군가, 무엇인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들려오기 마련인 삶의 소음과는 달랐다. 바람소리도 아닌 것이, 바람결인 양 환청인 양 들려오는, 아아, 혹은 오오 따위 종잡을 수 없는 희미한 탄식과도 같은 그 소리, 귀가 어두운 어머니가 한껏 볼륨을 높인 티브이 화면에서는 청춘 남녀의 사랑놀이가 현란하게 펼쳐지는데 나는 뭔가 견딜 수 없다는 느낌에 휘말려 보이지 않는 손에 등 떠밀리듯 집을 나섰다.

나의 밤길 걷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법 큰 야산을 끼고 있는 동네여서 산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산책로가 길게 이어졌다. 한적한 길을 걷다 보면 한 단계씩 낮아지는 음계처럼 어둠이 짙어졌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관 뚜껑을 열고 나오는 드라큘라처럼 집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걷기바람 탓인가, 오직 빠르게 걷기에 열중한 사람들도 심심찮게 만나게 마련이다.(...)

 

 밤의 풍경은 낮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르다. 역설적으로, 어두워져야 더 잘 보이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달과 별이 그러하고 어두운 허공 속에 외로이 서 있는 나무들의 자태가 그러하고 혼자 걷는 사람의 마음이 그러하였다.

 인적이 없는 길에서는 간혹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우줄우줄 따라오는 내 그림자를 보면서 걷는 동안 마음은 끈 풀린 연처럼 허허해지고 걸음은 정처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내 마음의 무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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